▲ ‘낙하산 논란’이 일었던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코레일 신임 사장으로 사실상 확정됐다. 사진은 허 전 청장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 | ||
“차라리 강경호 전 사장이 낫다.”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신임 사장으로 사실상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코레일의 한 직원이 내뱉은 말이다. 그는 “개인 비리로 구속된 강 전 사장 역시 낙하산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철도 분야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생 경찰생활을 한 허 전 청장의 경우 철도와는 완전히 무관한 인물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코레일 내부 기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동안 사사건건 마찰을 빚어왔던 노·사 양측도 허 전 청장 임명에 대해선 반대 의견이 지배적인 것인 것으로 알려졌다. 백성곤 노조 정책실장은 “역대 최악의 낙하산 인사로 기록될 것”이라며 “철도 전문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는 코레일 사장 자리에 경영 경험조차 전혀 없는 허 전 청장을 앉히려는 것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코레일의 한 고위 임원 역시 “노조의 반발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납득할 수 없는 인사라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상당수인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 5일부터 노조는 직원들을 상대로 허 전 청장 임명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다음날엔 주요 역사에 ‘철도에 경찰청장 출신 사장이 웬 말이냐’는 구호가 붙은 현수막이 내걸렸다. 아직 사장 후보로도 확정된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허 전 청장에 대한 비토 여론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노조는 허 전 청장이 공식적으로 취임하면 출근저지 투쟁을 비롯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장들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일단은 최종 결정권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에게 우리의 뜻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은 허 전 청장이 철도 분야 비전문가이기도 하거니와 과거 경찰청장 재직 당시 불미스런 일로 중도하차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허 전 청장은 지난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와의 쌀 협상 반대 시위 농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청장 직에서 물러난 바 있다.
이 때문에 노조 측은 허 전 청장이 코레일에 입성할 경우 ‘노사관계가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 관계자는 “철저한 상명하복 체계로 돌아가는 조직에서 생활한 허 전 청장은 노조에 대해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쌓아올린 노사 간 신뢰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레일 안팎에서는 허 전 청장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기업 선진화 방안을 완수할 책임을 맡은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코레일은 2012년까지 총 정원의 15%가량인 5115명을 감원해야 하고 2010년까지 현재 6000억 원가량에 달하는 적자를 절반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지만 노조에서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어 난항이 예상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가 ‘반 노동자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허 전 청장이 사장으로 임명되면 ‘대대적이고 무차별적인 탄압이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장 공모 직후부터 흘러나왔던 ‘허준영 내정설’에 대해 코레일 측에서는 “정해진 것은 없다. 적임자를 고르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해명해왔다. 하지만 코레일 주변에서는 사실상 허 전 청장이 낙점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다섯 명의 후보자 중 최종 후보를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허 전 청장을 단독 후보로 국토해양부 장관에게 제청할 것이 유력하다는 말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는 허 전 청장에 대한 비난 여론이 폭주하자 한때 또 다른 후보자를 대안으로 검토하기도 해 ‘이변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흘러나왔지만 막판에 다시 허 전 청장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참여한 몇몇 인사들은 격론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코레일의 고위 임원은 “공공기관운영위원회나 임원추천위원회가 거수기 역할에 그치는 것 아니냐. 미리 정해 놓은 후보를 뽑으려면 뭣 하러 이런 공모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