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송유진 기자 eujin07@ilyo.co.kr
웅진케미칼 인수후보군은 최근 LG화학이 가세하면서 6곳 이상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LG화학 이외에 GS건설, 휴비스, 도레이첨단소재, 티케이케미칼, 효성 등이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이번 웅진케미칼 매각은 한 가족이었던 LG와 GS의 대결로 압축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그런데 삼성그룹 계열인 제일모직이 다크호스로 부상할 조짐을 보여 업계 핫이슈로 급부상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둘째 딸인 이서현 부사장이 이끌고 있는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태기업. 1954년 세워질 때만 해도 모직 중심의 섬유 생산이 주된 사업이었지만, 현재는 화학·전자재료 전문 기업이 됐다. 패션과 섬유 부문의 비중이 30% 정도이고, 케미칼 부문이 주 업종이다.
제일모직은 바로 웅진케미칼의 ‘뿌리’다. 천연섬유가 주종인 제일모직이 1972년 화학섬유를 생산하기 위해 경북 경산 공장을 분리해 설립한 제일합섬이 웅진케미칼의 첫 이름이고, 1995년 삼성그룹 구조조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둘째 형인 고 이창희 회장의 새한그룹으로 분리·통합됐다. 이후 새한그룹 전체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해체되면서 워크아웃이 진행되다 2008년 웅진그룹으로 흡수돼 현재의 사명으로 바뀌었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웅진케미칼 인수 후보로 제일모직이 급부상한 배경은 웅진케미칼 내부에서 강렬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웅진케미칼 직원 1500명 가운데 10년차 이상은 대부분 새한미디어 시절 입사한 사람들이다. 두 번의 인수·합병 상처를 안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든든한 자금력과 비전을 가진 제일모직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게다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도 폴리에스테르의 화학섬유에 대한 확장 미련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아직은 수면 위로 부상하지는 않았지만 제일모직의 인수참여설이 점차 힘 받고 있다”고 전했다.
제일모직을 비롯한 주요 화학소재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웅진케미칼이 폴리에스테르 사업과 함께 수(水)처리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더 높게 쳐 주는 것은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필터 사업이다. 수처리 필터의 핵심 부품인 역삼투 방식의 멤브레인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해 국내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는 더 빠르게, 더 값싸게, 더 순도 높게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필터 기술인데, 거기에 가장 큰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 웅진케미칼인 것이다.
수처리 사업은 이미 가장 유망한 미래 성장 사업으로 떠오르는 분야다. 많은 국가에서 물 부족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세계 수처리 시장 규모가 지난해 기준 약 500조 원에 달하며 매년 10%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정부도 2020년까지 3조 4000억 원을 투자, 세계적인 물 기업 8곳을 양성하겠다는 ‘물 산업 육성전략’을 내놓은 상태다.
코오롱그룹은 계열사들로 구성된 수처리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구축해 20조 원 규모의 국내 시장을 노리고 있고, 효성도 역삼투 방식의 멤브레인을 자체 개발해 본격적으로 수처리 사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LG전자는 지난 2010년 수처리 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선정, 10년간 5000억 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LG화학의 인수전 참여는 수처리 분야의 시너지를 노린 것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현재 국내 대기업의 대부분은 이미 수처리 사업에 뛰어들었거나 혹은 검토 중이라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이러한 수처리 시장의 핵심기술인 필터에서 가장 우수한 경쟁력을 가진 웅진케미칼은 삼성, LG 모두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두 재벌그룹 간 맞대결이 최근 민·형사 소송으로 비화된 디스플레이 분쟁에 이어 웅진케미칼의 인수전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는 이유다.
박웅채 언론인
웅진케미칼 역사에는 삼성가 비운의 사연이 들어있다. 고 이병철 창업주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이어진 삼성가에서 분가한 기업집단은 한솔, CJ, 새한, 신세계가 있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웅진케미칼의 전 주인인 새한그룹만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병철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은 1966년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고, 그 여파로 부친의 신임을 받지 못하자 1973년 삼성을 떠나 새한미디어를 세웠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불행하게도 1991년 미국에서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를 장남 이재관 부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았다. 삼성가의 제일합섬(웅진케미칼의 모태기업) 지분을 넘겨받아 1995년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분리 이후 대대적인 기업 확장에 나섰던 새한그룹은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경쟁에서 도태되고 불법대출 사건까지 겹쳤다.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2000년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제일합섬도 (주)새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8년 웅진그룹에 넘어가 웅진케미칼로 다시 변경했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10년 이창희 전 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재찬 전 새한건설 사장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재계 1위 이건희 회장의 형님 댁에서 벌어진 2대에 걸친 비운이다.
이 집안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해 5월 이병철 창업주의 차명재산 상속을 둘러싼 삼성가 형제들의 소송이 벌어졌을 때다. 이 전 사장의 부인 최 아무개 씨(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와 두 아들도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주식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그 소송전의 1심은 지난 2월 원고 패소로 막을 내렸다. 최근 비자금 수사를 받고 있는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부친이자 이건희 회장의 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항소를 제기한 상태지만, 이창희 전 회장 가족들은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