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전문가들은 “환율 급락은 수출 경쟁력에 악영향을 주고 수입을 늘리는 효과를 내면서 바닥을 다지고 있는 국내 경제에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증시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차 등 수출주의 비중이 크다. 그동안 증시 급등을 이끌었던 유일한 매수 주체인 외국인들은 수출주 중심으로 사들였으나 향후 매수 강도가 약화되거나 매도세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망이다.
원·달러 환율의 최근 하락 폭은 깊고 빠르다. 가령 자녀를 미국에 유학을 보낸 ‘기러기 아빠’가 외화 송금을 언제 했느냐에 따라 희비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1000만 원을 미 달러화로 환전해서 보내면 미국에 있는 자녀가 보름 전(4월 말)에는 7375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13일에는 8039달러를 받을 수 있게 돼 664달러(약 83만 원) 이익을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교포, 주재원 등이 보유하고 있던 원화를 달러화로 교환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는 이유다. 외환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원화 교환이 5월 12일까지 647억 원으로 지난 한 달보다 여덟 배를 웃돌았다. 지난해 12월 이후 5개월간 509억 원을 넘는 규모다.
원·달러 환율은 올 들어 넉 달간 줄곧 1300원 선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최고점인 3월 2일(1570.3원)을 전후해 20일간 1500원을 웃돌던 것이 불과 두 달 전 일이다. 지난 1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주 주말보다 9.1원 하락한 1237.9원에 거래를 마쳤다. 4월 30일 1282원에 거래되면서 1200원대로 주저앉은 뒤 계속 떨어지면서 지난해 10월 14일 1208원 이후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것이다.
원·달러 환율의 급락은 경기침체 완화 조짐과 함께 국내 증시의 급등을 가능케 한 최대 원동력이었다. 3월에 대규모로 만기가 도래한 외채 상환에 대한 부담이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증폭됐으나 외채 차환 발행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다시 약세로 돌아서자 국내 금융시장은 3월 초부터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따라 원화 강세와 한국 CDS프리미엄(Credit Default Swap Premium: 채권 부도시 매입자에게 손실을 보상해주는 파생상품. CDS의 거래 수수료가 높을수록 부도 가능성도 높다)의 하락 안정 등을 주목한 외국인 투자자들도 ‘사자’로 돌아섰다. 3월 초부터 이달 11일까지 외국인이 사들인 주식 총액은 무려 7조 5000억 원에 달한다. 환율 하락을 예상한 베팅이라는 진단이 많다.
또 오비맥주를 인수하며 첫 한국 투자에 나선 세계 최대 사모펀드(PEF) KKR의 행보도 환율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인수 가격이 시장 예상보다 10~20% 높았다”며 “이는 나중에 되팔 시점의 원화 강세를 염두에 둔 결정”이라고 분석했다.
부동산 시장에서도 원화 약세를 틈타 지난해 말부터 유입된 교포 등의 해외 투자자금이 단기간에 30% 안팎의 고수익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외국인의 순매수와 함께 3월 초 장중 1000포인트(p) 선이 무너졌던 코스피지수도 두 달 만에 400p가량 뛰어 1400p 선 위로 올라서는 등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국내 증시의 급등을 가능케 한 환율 급락이 이제는 증시 악재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바로 3월 이후 증시의 주도주로 행세했던 정보기술(IT), 자동차 등 수출주에 환율 급락이 대형 악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 수출기업이 1분기에 어닝 서프라이즈(깜짝실적) 수준의 좋은 실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원·달러 환율 강세가 급격히 진행돼 주요 경쟁 상대인 일본 기업과의 가격 경쟁에서 완승을 거뒀던 요인이 컸다. 하지만 1분기 평균 1418원에 달했던 원·달러 환율이 1240원대까지 떨어진 이상 그러한 환율 효과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LG경제연구원이 내놓은 ‘최근 글로벌 기업과 한국기업의 경영성과’ 보고서는 최근 국내 기업들의 실적 호전이 환율 효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고서는 자국 통화 기준으로 미·일·유럽 기업들은 지난해 매출증가율이 모두 떨어졌으나 국내 기업들은 지난해 매출증가율이 전년의 13.2%에서 24.3%로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기서 환율 효과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들의 매출액 증가율은 주요 선진국 기업들에 비해 더 큰 폭으로 추락한 것으로 분석됐다. 국내 기업들의 실적이 지난해 원화가치의 급락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에 증시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의 급격한 하락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경민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환율 급락이 회복세를 보이던 수출기업의 실적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국내 증시도 상승 모멘텀을 잃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다만 원·달러 환율 하락이 항공 해운 음식료 여행업종 등의 원화강세 수혜주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므로 환율 급락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강성원 동부증권 연구원은 “수출주 주가 상승은 주춤하겠지만, 원화 강세로 원료나 원재료 수입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운송 및 내수주 등에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원화 강세는 좀 더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하반기에 원·달러 환율을 1150∼1250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증권사 사장은 “원화 강세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다. 경제 환경이 급변할 때 투자자산의 변동을 준비해야 한다”라며 “환율 움직임에 안테나를 세워야 할 시점”이라고 투자자들에게 조언했다.
류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