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왼쪽) 신동빈 롯데 부회장 | ||
출발은 롯데가 한 발 앞섰다. 지난 1월 와인업계 2위인 두산주류BG(현 롯데주류BG)를 인수하며 순식간에 업계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간 것. 롯데는 ‘마주앙’을 생산하며 점유율 11%를 기록하던 두산주류와 기존에 와인사업을 전담하던 롯데아사히(점유율 4.5%)를 합치며 점유율 1위(16%)인 금양인터내셔널을 바싹 뒤쫓았다. 주류업계에서는 금양인터내셔널보다 유통망에서 절대적인 우세에 있는 롯데의 1위 탈환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신세계는 그동안 와인을 직접 생산하거나 수입하지는 않고 판매만 해왔다. 그러다가 지난 1월 본격적인 사업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 신세계와인컴퍼니(현 신세계L&B)를 설립했고 지난 5월 6일 ‘와인을 직수입해 공급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여무상 신세계L&B 대표는 “거품을 확 뺀 합리적인 가격대의 와인을 선보여 이익을 낼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신세계는 와인시장 진출선언 다음날 세계 9개국에서 수입한 와인들을 이마트 전국 121개점과 신세계백화점 조선호텔 등에서 동시 판매에 들어갔다. 이마트에서는 점포별로 30~50종의 와인을 선보이고 백화점에서는 까다로운 소비자 기호에 맞춰 150여 종을 판매할 예정이라고. 가격은 국내 시장가 대비 평균 30% 정도를 낮췄다.
신세계는 올해 85억 원의 매출을 올려 시장에 안착하고 2013년까지 100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업계 1위에 등극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다.
서울 근교 이마트의 한 지점장은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와인 판매대가 북적거린 것은 매장 입점 후 처음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신세계 측은 “대형마트와 백화점 호텔로 구성된 탄탄한 판매망을 통해 시너지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세계의 와인시장 진출에 경쟁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신세계가 국내 최대의 와인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 지난해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등 신세계 계열사가 와인판매를 통해 올린 매출액은 750억 원가량. 국내 와인시장 규모가 5000억 원가량으로 추산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약 16%에 해당한다. 롯데쇼핑을 포함한 유통업체들 중 단연 1위다. 특히 국내 와인의 35%가 대형 마트에서 팔리고 있다는 점도 이마트를 보유한 신세계의 시장 진출을 경쟁업체들이 우려하는 이유다.
올해 와인업계 1위 등극이 유력시되는 롯데는 ‘아직 신세계는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인 듯하다. 롯데의 한 관계자는 “와인을 포함한 주류 사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막강한 신세계의 유통망을 고려하면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노하우에서 우리가 월등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업계 판도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그는 “신세계가 가격 파괴를 내세웠지만 이미 우리는 적정 가격을 책정해 팔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고삐는 늦추지 않았다. 일단 롯데는 신세계 못지않은 유통망을 십분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최근 롯데백화점이 분당점의 와인매장을 롯데아사히에 임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가격파괴’를 기치로 내건 신세계에 ‘물량 공세’로 맞선다는 전략이다.
현재 롯데는 1000여 종의 와인을 직수입하거나 자체적으로 생산해 팔고 있는데 이는 신세계보다 네 배 이상 많은 수치다. 주류사업을 맡고 있는 롯데쇼핑음료의 한 관계자는 “직수입하는 와인의 종류를 지금보다 더 다양화할 계획이다. 와인이 대중화될수록 소비자들은 가격보다 맛을 중요시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처럼 롯데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한 신세계의 와인 시장 진출에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와인 판매가 고객 흡인력에 큰 기여를 한다’는 업계의 속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앞서 언급한 이마트의 한 지점장은 “사실 와인만 사서 가는 고객들은 거의 없다. 다른 상품들의 판매도 동시에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롯데백화점의 한 판매 담당자도 “선물 등의 이유로 와인을 사러 오는 고객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 중 대부분이 다른 곳에도 지갑을 연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년 실적을 놓고 치열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양 그룹이 와인시장에서 충돌하게 된 것도 쉽게 이해가 간다.
또한 신세계가 와인시장을 발판으로 주류업에 뛰어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도 롯데가 방심할 수 없는 대목이다. 최근 주류업계에는 ‘신세계가 몇몇 지역 주류 업체들을 인수후보에 올려놨다’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최근 오비맥주 인수에 실패한 바 있는 롯데로서는 라이벌의 주류 시장 진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기선제압’의 필요성이 절실할 것이란 관측이다.
이번 와인전쟁은 양 그룹의 ‘황태자’ 신동빈 부회장과 정용진 부회장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흥미를 끌 것으로 보인다. 신 부회장과 정 부회장은 재계에서도 유명한 와인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롯데가 두산주류를 인수한 후 그룹 안팎에서는 ‘신 부회장이 처음처럼보다는 마주앙을 염두에 뒀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신 부회장은 평소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한다. 신세계와인컴퍼니 설립을 주도했던 정 부회장도 이번 와인 직수입을 앞두고는 직접 맛을 보며 와인을 골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양 그룹의 황태자들은 와인을 포함한 주류사업 때문에 ‘구설에 시달리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신 부회장과 정 부회장이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주류사업의 확장을 두고 그룹 내에서는 아직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 부회장과 아버지인 신격호 회장의 ‘불화설’이 나돌았던 것이나 최근 불거진 정 부회장과 구학서 부회장의 신경전도 모두 주류사업이 발단이 됐다고 한다. 자신의 경영 수완을 알리고 그룹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이번 와인전쟁에 임하는 황태자들의 태도는 남다를 듯하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