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초짜’ 시절 회식자리 실수담 하나씩은 갖고 있다. 신입사원들이 아무리 정신무장을 하고 임해도 신입의 위치상 거절할 수 없는 술잔에 정신은 몽롱해지고 실수는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법이다.
게임회사에서 음악 관련 일을 하는 C 씨(29)는 입사 6개월 차에 회식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카리스마’를 내보이게 됐다.
“오랫동안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안정적인 직장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입사한 곳이에요. 근데 문제는 회식자리에서 터졌죠. 평소에 친분 있다고 여기던 팀장이 살살 약을 올리더라고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음악생활을 시작했고 그 분야만큼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는 버릴 수 없었다. 이 점을 팀장이 건드린 것이다.
“‘이거 안하면 할 수 있는 게 뭐 있냐’면서 자꾸 건드리는데 처음엔 웃고 받아줬죠. 그런데 점점 화가 났어요.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표정이 확 굳어졌죠. 싸늘해진 분위기에 저도 정색하고 대들었는데 머리를 툭툭 쳐서 확 일어나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떴어요.”
C 씨는 아직도 팀장이 화를 유발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좀 더 참고 넘어갔으면 다음날 회사에서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친구들은 “그 상황에서 참는 것이 더 바보”라고 위로해 줬어도 그는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사실 C 씨 정도면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른다.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G 씨(30)는 평소 의견차이가 있었던 상사와 소위 ‘맞짱’을 뜨고 말았다. 사무실을 이전하고 다 같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막걸리를 마시던 중에 논쟁이 벌어졌다.
“환경 문제인가 그랬는데 논점이 달라도 너무 달라 그날따라 논쟁이 심하게 번진 겁니다. 저보다 열 살이 많은 상사였는데 욕설이 오가고 막걸리 잔이 날아다녔죠. 그러다 밖으로 나가게 됐는데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머리꼭지까지 취해 난동을 부리던 G 씨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한 것. 평소 경우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술자리인 것을 감안해 상사는 너그럽게 받아줬지만 진짜 용서를 했는지 알 수가 없어 G 씨는 그 상사의 얼굴만 보면 좌불안석이다.
컨설팅회사에 근무하는 H 씨(여·29)는 회식자리에서 여자 상사와 불꽃 튀는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술은 맥주 한모금만 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눈에 거슬렸는지 바로 위의 대리가 자꾸 술을 권하는 거예요. 평소 목소리도 크고 여장부 같은 상사였는데 좀 취했더라고요. 재차 거절했는데도 마시라고 고집을 부리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서 끝까지 싫다고 했죠. 융통성이 없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왜 그렇게 쓸데없는 것에 목숨 걸고 강요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평소 여성스런 외모에 목소리도 조용하고 누가 봐도 ‘참한 처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 회식자리 한 번으로 ‘강단 있는 여성’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했다. 덕분에 주변에 건드리는 사람 없이 조용한 직장생활을 하게 됐다.
회식자리에서 술 마시고 ‘정신 줄을 놓는 순간’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간 공들여 쌓은 자신의 이미지 또한 추태와 함께 사라지는 법이다. 특히 여자의 경우 차후 회사생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O 씨(여·27)는 회사 사람들과 1박2일로 엠티를 갔다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노래방에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일이 생겼다.
“기억도 안 나요. 증언에 의하면 남자친구와 제가 전화를 하면서 평소보다 더 심하게 오버해서 애교를 떨었다고 하더라고요. 남들이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말이죠. 하도 여러 차례 통화를 하면서 그러니까 다른 동료분이 그만하라고 했었나 봐요. 그 말에 기분이 상했었는지 남자친구한테 전화가 다시 왔을 때 보란 듯이 ‘×× 왜 자꾸 전화하고 지랄이야’라고 하면서 전화를 받더랍니다.”
그녀의 ‘만행’은 숙소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다. 전화를 끊으라는 말에 크게 꼬였는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딱딱 자르고, 심지어 반말까지 했었다고. O 씨는 회사를 옮긴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좋은 이미지를 쌓아도 모자랄 판에 술 먹고 심한 주정을 했기 때문에 계속 회사를 다녀야 할지조차 고민이다.
여성들에게 ‘회식자리’ 하면 빠지지 않는 불쾌한 에피소드도 있다. 여직원들을 ‘도우미’ 취급하는 남자 직원들 때문이다. K 씨(여·31)는 영업 분야에 근무해 거래처 직원들과 회식자리에 동석할 일이 많다. 어느 분야보다 회식자리가 중요한 업무의 연장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싫어도 꼬박꼬박 참석하는 편이다.
“직장생활 6년차지만 어느 업체를 가도 꼭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는 직원들이 하나씩 있어요. 한번은 노래방에 가서 박수쳐주면서 분위기 맞춰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업체 쪽 사람이 블루스를 추자고 손을 잡는 거예요. 몇 번을 거절했는데도 자꾸 치근덕거려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중요한 자리라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업체 쪽 다른 직원이 눈치 채고 막아줘 슬그머니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K 씨는 “끝까지 참아서 얼굴 붉어질 실수를 하진 않았지만 매번 이렇게 참는 것에 회의를 느낀다”면서 “매번 회식 다음 날이면 빨리 잊자고 다짐하는 생활의 반복이 지겹다”고 털어놓았다.
인터넷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최근 직장인들의 회식문화가 경제 불황과 함께 변화된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2차에 3차, 4차까지 가던 회식자리가 1차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 회식의 횟수도 지난해에 비해 줄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비율상 차지하는 시간이 줄었다 해도 그 중요성은 줄지 않는다.
미국 대기업의 최고 경영진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고 현재 이력관리 전문가로 활동하는 신시아 샤피로는 그의 저서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에서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임을 강조, 또 강조했다. 사람들이 ‘취중진담’이라는 말을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상황이다. 취하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프로 직장인’의 세계인 듯싶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