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마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투잡’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각박한 도시생활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 타향살이를 하는 직장인들의 경우에는 집세도 만만치 않다. 대학교육을 받았으니 가장 손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제2의 직업은 ‘선생님’이다.
현재 이름난 출판사에 다니는 J 씨(여·30)는 투잡으로 여유자금을 마련해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똑순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 서적 관련 출판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2년 정도 근무 후에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출판미디어 쪽을 좋아하긴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대체로 7시면 야근 없이 퇴근을 하는 분위기여서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초·중등학생 영어를 가르쳤죠. 보습학원이라 때로는 국어 수업도 해야 했고요. 그렇게 약 2년 정도를 하고나니 어느 정도 목돈이 생겼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2년 가까이 미디어 관련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도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전보다는 훨씬 큰 규모에 대우도 좋다. 영어에 자신감이 붙어 가끔씩 원고 번역일도 하고 있다. 여전히 주말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J 씨.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확실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의류회사 총무팀에 근무하는 M 씨(여·34)도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평범한 학원은 아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벨리댄스 학원이다.
“서른 살쯤에 삶이 너무 무료하고 나이 들어가는 게 몸으로 여실히 느껴졌어요. 용기를 내서 평소 관심 있었던 벨리댄스 전문 강사반에 등록했죠. 처음엔 너무 힘들었는데 2년 정도 지나니까 공연 문의도 많이 들어오고 가르치는 일에도 흥미를 가지게 됐어요.”
그녀 자신도 늦게 시작한 만큼 주부들이 어떤 점을 힘들어 하는지 잘 안다.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회사 일을 마치고 저녁반을 뛰거나 주말반을 맡아 운영하는데 인기가 좋다. M 씨는 “무조건 돈을 벌려고만 하면 투잡이 힘에 부쳐 오래가기 힘들다”며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의욕이 생기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자신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직장의 전문성을 살려 투잡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전문직이며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받아서 한다. 교육컨설팅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O 씨(여·33)는 회사에서 근무를 하며 거래처나 관련 업계 지인을 통해 기업체 브로슈어 제작을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건당 페이가 센 편이에요. 업체 홍보 브로슈어 같은 경우 하룻밤 꼬박 투자하면 80만 원 정도를 받죠. 체력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들어오는 돈이 커서 쉽게 거절할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회사 업무에 지장 없이 모르게 처리를 해야 하는 게 더 힘들지만요.” 현재 회사에서 받는 연봉에 ‘과외비’까지 합해 꽤 많은 돈을 버는 O 씨는 휴가 때면 어김없이 해외로 여행을 가는 등 화려한 싱글 생활을 즐기고 있다.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는 L 씨(34)는 업무 특성상 글 쓸 일이 많다. 원래 기자를 꿈꾸던 그는 글재주를 인정받아 프리랜서 형태로 원고 청탁을 받을 때가 많다. 1주일에 200자 원고지 7~8매 정도의 원고 한 건만 처리해도 한 달이면 월급의 반이 조금 넘는 수입이 나오기 때문에 큰돈은 아니지만 만족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는 선배의 부탁으로 IT 관련 잡지사의 제품 리뷰 원고를 써줬어요. 그런데 처음 글이 마음에 들었던지 계속 청탁이 오더라고요. 그쪽을 시작으로 소개에 소개를 거쳐 홈쇼핑 제품 카탈로그의 소개 기사나 학원 원장이나 학생 인터뷰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 시간이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들인 시간에 비해 수입이 괜찮아서 청탁 거절은 웬만해선 하지 않아요.”
여윳돈이 좀 있는 경우 큰 수익을 기대하면서 직접 하나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투잡족도 있다. 이런 경우 원칙적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된 회사의 눈치가 많이 보이지만 몰래 운영하거나 상사의 양해를 얻는다.
자동차회사에 근무하는 K 씨(38)는 퇴근 후 아내와 함께 바(Bar) 형태의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명동 인근에 오래전부터 있던 카페를 인수해 문을 연 것. 그렇게 운영한 지 4년이 넘었다. 99㎡(약 30평) 정도 규모에 현대적인 분위기로 리모델링을 했지만 원래 있던 라이브 카페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가게는 고객이 항상 바글거리지는 않지만 고급스런 이미지를 살려 테이블 단가가 높은 편이다. K 씨 부부 외에 아르바이트 직원 두 명을 쓰면서 흑자 경영이 유지된다.
“현재 직장인 밴드를 하고 있는 데다 음악 동아리 출신인 점을 살려 금요일부터 주말에는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어요. 지역과 가게 분위기 특성상 손님 대부분이 30·40대 직장인들이에요. 공감대 형성이 잘 돼서 대화도 많이 합니다.”
쇼핑몰을 운영하는 ‘투잡 사장님’도 있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만만치 않다는 것이 경험자의 말이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Y 씨(33)는 수입 비타민 관련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사규에 다른 일을 하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어 직속 상사에게만 살짝 보고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정상적인 업무를 하고 있지만 휴대전화로 제품 문의가 올 때가 많아요. 요새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자신에게 맞는 제품 상담 전화가 부쩍 늘어서 곤란하기도 합니다. 저녁에 퇴근하면 주문 들어온 것을 체크한 후 포장 작업을 합니다. 동생이 다음날 발송 하고요. 작은 수익이라도 아쉬운 마당이라 그만둘 수가 없네요.”
최근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1101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15.5%가 부업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그중 12.9%는 본업을 포함해 무려 3개 이상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78.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경기침체가 본격화된 지난해 하반기 이후부터 투잡족의 생활에 뛰어들었다. 인크루트 관계자는 “현재 부업을 하고 있지 않은 응답자 중 66.9%가 ‘투잡을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며 “투잡 열풍은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