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 1차 회의. 이 날 ‘채권거래세 도입’ 정책 제안이 포함된 보고서 작성에는 골드만삭스, 맥킨지 등 외국계 금융회사 2곳이 참여했다. 사진제공=청와대
시장이란 게 원래 오르기도, 내리기도 하지만 이날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이날 아침 청와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국민경제자문회의가 처음으로 예정돼 있었다. 헌법에 설치근거를 둔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회의다. 이 첫 회의의 주제는 ‘한국경제에 대한 인식과 향후 정책과제’. 보고서 작성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삼성경제연구소·골드만삭스·맥킨지 네 곳이다.
두 외국계 금융회사가 참여해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채권거래세 도입’ 정책제안이 포함됐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채권투자자들은 투자수익의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투자자들에게는 분명한 악재다.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인하(채권 가격상승)를 예상하던 국내 기관들은 청와대 회의 내용을 알 턱이 없었다. 이럴 때는 먼저 파는 쪽이 유리하다. 반대의 경우 가격 하락에 따른 손실을 더 많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국책기관인 KDI를 제외하면 보고서 작성자는 모두 민간기업이다. 특히 골드만삭스는 세계 1위 투자은행으로 국내에 투자하는 외국인과 깊은 거래관계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다. 맥킨지 역시 종합컨설팅 회사인데,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과 거래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월 말 현재 국내 채권시장에서 외국인 보유금액은 97조 4000억 원이며, 보유비율로는 7.24%에 달한다. 외국인들의 움직임에 따라 금리가 출렁이면서, 한국은행의 ‘금융주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게 요즘 시장 상황이다.
이날 청와대 회의 내용의 보도제한(엠바고)이 풀린 시간은 오전 10시. 그런데 외국인은 이에 앞서 장이 열리자마자 국채선물 매물을 쏟아냈다. 처음 시장은 전날 밴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양적완화(경제를 살리기 위해 시중에 대규모로 돈을 공급하는 작업)를 끝낼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 원인인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시장이 예상했던 재료로 그 때문만이라고 하기엔 매도 규모가 너무 컸다. 이날 하루에만 4조 4993억 원어치의 국채선물(3년만기)을 순매도했다. 이전 하루 최고 순매도 기록인 2조 5000억 원의 두 배 가까운 규모다.
국내 채권시장 규모는 약 1100조 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날 채권가격 하락폭이 0.11%다. 평가금액이긴 하지만 어림잡아 12조 원 넘는 돈이 증발한 셈이다. 한 채권 매니저는 “하반기 한국은행의 추가적인 금리인하가 예상되다 보니 미국발 악재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웬만큼 내리다 말 것으로 생각했다. 채권거래세 도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재료였다”며 “외국인들이 어떻게 알고 장 초반부터 그렇게 공격적으로 매도에 나섰는지 알 수 없다”고 탄식했다. 이날부터 3일간 외국인의 국채선물 순매도 규모는 6조 7636억 원에 달하고, 금리(국고채 3년 기준)는 0.17%포인트나 올랐다. 20조 원 가까운 시가총액이 날아간 셈이다.
청와대의 중요한 경제 관련 회의에 외국계 금융기관 관계자가 참여하는 것은 이미 오랜 관행이 됐다. 외환위기 이후 영향력이 커진 외국인들의 견해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골드만삭스, 제이피모건 등은 단골손님이다. 반면 국내 금융기관 전문가들이 초청받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도 민간 경제연구소 정도지, 국내 민간 금융회사 전문가가 초청받는 경우는 전무하다. 특혜시비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외국계 금융회사 관계자들이 정부의 각종 주요 회의에서 고위 관료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실무 공무원들이 정책 초안을 작성할 때도 외국계 금융기관의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외국계 금융기관의 한 임원은 “정책에 대한 시장 반응을 사전에 알아보는 과정에서 정부 관료의 전화를 받는 경우가 많다”며 “정책 내용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어떤 정책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사전에 정보가 새는 셈이다.
외국인이 중요한 정부 정보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는 의혹은 시장 참여자들 대부분이 품고 있다. 우선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 외국계 금융회사 창구가 주로 이용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은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행동이다. 따라서 정부의 주문 현황을 미리 알면 환율시장의 방향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외국인들은 역외시장을 통해 우리 금융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정부 정보를 이용해 선행매매를 한다는 게 의혹의 내용이다.
단기외채가 문제될 때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외국계 은행 국내 지점이나 국내 법인이 본사로부터 차입한 외화 탓이 크다는 게 확인된다. 이들은 차입까지 해 가면서 국내 외환시장에서 돈을 벌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외환시장의 한 관계자는 “외국인들은 글로벌 정보에 있어 국내보다 한 발 빠르다. 그런데 국내 정보에서조차 외국인들에게 뒤진다고 생각할 때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외국인은 국내 주식시장의 40%를 차지한다. 외환시장도 쥐락펴락한 지 오래다. 이제 남은 것은 채권시장인데, 이마저 외국인 손에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많다. 국채는 곧 정부에 대한 영향력이다. 외국인이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뜻은 곧 그 나라 정부에 대한 지분을 많이 갖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금융시장을 모니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외환과 채권이다. 주식이야 기업에 대한 평가이지만, 외환과 채권은 국가 경제시스템에 대한 평가다. 1997년 외환위기의 주범도 사실 주식이 아니라 채권이었다”고 기억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