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치동에 있는 하이닉스반도체 서울 사무소. | ||
그동안 하이닉스 매각설은 마치 급물살을 탈 것처럼 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왔다. 올 초에도 ‘6월 중 본입찰, 9월 중 매각 완료’ 관측이 퍼졌지만 이내 수그러들었다.
최근 들어 재계와 금융권엔 하이닉스의 ‘9월 본입찰, 12월 매각 완료’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유상증자로 하이닉스의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면서 매각작업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 전망하는 시선도 많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관계자도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이달(6월) 안에 구체적 일정이 나올 것”이라며 연내 매각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환은행은 조만간 잠재적 투자자로 거론되는 기업들에 인수제안서를 보낼 예정이다.
재계와 금융권에서 하이닉스 인수 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는 기업들은 SK LG 한화 현대중공업 포스코 현대차 등이다. 자금 상황이 좋은 데다 인수·합병(M&A)을 통한 사세 확장 가능성이 줄곧 거론돼온 기업들이다.
현대중공업그룹 측은 “하이닉스 매각 소문이 돌 때마다 우리 이름이 언급되는데 정작 그룹 내부에선 검토조차 안했다”는 입장이다. 포스코 관계자도 “(포스코는) 철강이나 건설 에너지 쪽에 역량을 쏟는 데 주력해야 하는 회사다. 반도체 회사 인수를 고려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이다. 현대·기아차그룹 측도 “자동차와 제철 신경 쓰기에도 바쁘다”며 하이닉스 인수전 참여 가능성을 일축했다.
금융권에선 불황이 길어지고 있지만 위의 그룹들이 하이닉스 인수 여력을 충분히 지녔다는 점에서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후보군에 오른 곳들은 하이닉스 인수를 꺼려할 만한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
SK그룹은 최근 금융업 확장에 시선이 쏠려 있다. 얼마 전 재계를 화들짝 놀라게 한 은행 지분 인수설은 SK 측이 극구 부인하면서 수그러들었지만 하나은행에서 분사 예정인 카드부문 지분 인수와 관련해 SK-하나금융 간 조율이 진행 중이다. 투자 여력이 아무리 넘쳐도 금융업 강화와 하이닉스 인수를 동시에 넘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LG그룹에겐 지난 1999년 반도체 빅딜로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LG반도체를 넘겼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이후 구본무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발길을 끊었을 정도로 아쉬움이 컸다.
일각에선 하이닉스 인수를 통한 명예회복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LG그룹 수뇌부는 하이닉스에서 마음을 돌린 지 오래됐다고 한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올 초 기자간담회에서 하이닉스 관련 질문에 대해 “수차례 얘기가 나왔지만 생각이 없다”며 “LG전자는 그동안 반도체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5월 현대종합상사 입찰에 단독으로 응했다가 유찰의 아픔을 겪었다. 현대종합상사 재입찰 참여를 저울질 중인 현대중공업은 하이닉스 매각 이후 진행될 현대건설 인수전 역시 옛 현대가의 정통성 계승 차원에서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대형 M&A 때마다 단골손님으로 오르내리는 현대중공업이라 해도 하이닉스까지 넘볼 여유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GS와의 컨소시엄 결렬로 인수 성사 문턱에서 좌절의 쓴 맛을 본 포스코, 그리고 대우조선해양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가 자금문제로 인수포기를 선언한 한화는 일단 내실을 다지는 데 중점을 두려는 모습이다. 자동차와 철강업 투자에 바쁜 현대·기아차 역시 반도체에 한눈 팔 여력은 없어 보인다.
재계와 금융권 일각엔 ‘하이닉스 인수 후보로 거론된 그룹들 중 세 곳이 실사팀을 꾸렸다’는 구체적인 소문도 퍼져 있다. 그러나 해당 그룹들은 “사실무근”이라며 펄쩍 뛴다. 이중 한 그룹 관계자는 “솔직히 반도체는 경기를 많이 탄다. 요즘 세계 경기도 좋지 않은 데다 하이닉스는 1위 업체도 아니지 않느냐”며 불황기에 하이닉스를 굳이 끌어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채권은행들이 하이닉스 몸값을 띄우기 위해 일부러 대기업 인수후보 리스트를 흘리고 다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이닉스 인수 후보군에 오르내리는 한 그룹 관계자는 “경기가 악화되면서 M&A 시장도 침체된 데다 대우조선해양 매각 실패로 국내 투자자들이 대형 매물에 부담을 느끼게 되자 다급해진 채권은행들이 ‘어느 그룹이 하이닉스를 노린다’ 같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인수 후보로 거론된 다른 그룹 관계자도 “하이닉스 말고도 채권단 관리 중인 대형회사들 중 여러 곳에서 인수의향을 자주 물어온다. 매각이 지체되니 채권단이 꽤나 조급해진 모양”이라며 혀를 찰 정도다.
하이닉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측은 “아직 매각 일정이 공식화된 건 아니지만 하이닉스에 유동성 지원을 위한 유상증자를 단행하는 등 여러 자구노력을 펼치다 보니 재계에서 갖가지 해석을 내놓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경기 불황과 채권은행들 각자의 사정으로 작업이 지연돼 왔으나 조만간 매각 일정이 잡힐 것”이라고 덧붙였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입찰공고 이전부터 수년간 물밑 신경전을 벌였던 여러 대형 M&A 사례와는 달리 ‘살 사람’이 선뜻 나서지 않는 하이닉스 매각 작업이 채권단 바람대로 조만간 순조롭게 이뤄질지 재계와 금융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