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 광고 포스터에 정의선 기아차 사장 얼굴을 합성한 사진. | ||
지난 6월 9일 현대·기아차그룹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는 김경배 부사장(45)의 신임 등기이사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주총)를 오는 7월 23일 개최한다고 공시했다. 올해 1월 글로비스 대표이사직에 취임했던 이광선 전 사장이 최근 고문직으로 2선후퇴한 상태라 김 부사장이 이번 주총을 통해 대표이사로 선임될 전망이다.
지난 5월 31일 글로비스로 발령받기 이전까지 김 부사장의 보직은 정몽구 회장 비서실장(전무)이었다. 정 회장을 지근거리 보좌해온 김 부사장의 글로비스행은 ‘후계 작업이 본격 궤도에 오르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글로비스는 정의선 사장이 지분 31.88%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는 곳. 그룹 내 물량 지원으로 고속 성장한 글로비스가 훗날 정 사장의 경영권 승계용 실탄창고로 평가받아 왔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형태의 순환출자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정 사장은 지배구조 핵심을 이루는 계열사들 중 기아차 지분 1.87%만을 보유하고 있다. 정 사장이 만약 글로비스 지분 전량을 팔아 기아차 주식을 사들인다면 과세를 감안해도 두 자릿수 이상의 지분율을 확보할 수 있다. 기아차 최대주주가 되면 순환출자로 엮인 그룹 계열사들 지배도 가능해진다.
이렇게 차기 총수 등극의 디딤돌로 기대되는 글로비스의 대표이사로 정 회장의 측근인사가 가게 된 과정 역시 정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임박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이광선 전 사장이 글로비스 사장 취임 5개월 만에 고문으로 물러난 사이 김 부사장은 지난 4월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했으며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부사장에 오르는 초고속승진 사례를 기록했다.
▲ 사재 출연을 약속해 비자금 사건 집유 판결을 이끌어냈던 정몽구 회장. | ||
글로비스 인사에 이어 정의선 사장의 기아차 대표직 복귀 여부 또한 주목을 받는다. 정 사장은 지난해 4월 실적 저조 논란 속에 기아차 대표직을 사임했다. 이후 정 사장은 해외 출장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내공 쌓기’에 주력했고 그러는 사이 기아차가 해외 무대에서 호평을 받으며 실적개선도 이뤄졌다.
정 사장이 직접 삼고초려에 나섰던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 영입은 정 사장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힌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슈라이어 부사장은 다소 밋밋했던 기아차 디자인을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정 사장의 잰걸음 속에 기아차 실적이 호전되면서 그의 위상 강화 관련 관측이 쏟아졌다. 정몽구 회장이 올해 초 기아차 등기임원직을 사임하자 정의선 사장이 3월 주총을 통해 대표직에 복귀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 바 있다. 일부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정 사장의 그룹 부회장 승진설마저 돌았다.
정 사장은 최근 정몽구 회장의 벤플리트상 수상을 위한 미국일정 수행을 마치고 곧바로 미국 현지에서 이명박 대통령 순방 경제인 수행단에 합류하는 빡빡한 해외일정을 치러냈다. 정 사장이 해외에서 그룹의 얼굴 역할을 하는 사례가 잦아지다 보니 그룹 내 공식 2인자 등극을 통한 경영권 승계 가속화 관측도 자연스레 따라 붙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현대·기아차그룹 측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그룹 관계자는 “그동안 정 사장 관련 소문은 많았지만 현실화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밝혔다.
대표직 복귀나 부회장 승진도 중요하지만 승계체제 확립을 위한 필수 관문은 바로 지분 확보다. 그런데 정의선 사장이 글로비스 지분을 팔아 기아차 지분을 사들이는 작업이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가 않다. 정몽구 회장의 사재 출연 약속이 글로비스와 얽혀 있는 까닭에서다.
지난 2006년 4월 이른바 ‘현대차 비자금 사태’가 터지면서 그룹 측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통해 “총수 일가가 보유한 글로비스 주식을 포함한 1조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검찰이 비자금 조성 근원지로 글로비스를 지목했던 까닭에 이 회사 지분이 출연대상으로 언급된 것이다.
정 회장은 지난 2007년 5월 현대차 비자금 사건 공판에서 변호인을 통해 “2013년까지 7년간 매년 1200억 원씩 총 8400억 원의 사재를 사회공헌기금으로 출연하겠다”고 밝혔다. 이 약속은 정 회장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정 회장은 2007년 10월과 지난해 7월 두 차례에 걸쳐 총 900억 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141만 882주)을 그룹 계열 공익법인인 해비치문화재단에 출연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정 회장이 광복절특사로 사면된 이후로 추가 사재 출연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 회장의 사회환원 작업이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 사장이 글로비스 지분 매각을 통한 기아차 지분 매입에 나설 경우 현대차를 향한 여론의 역풍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일각에선 정 사장 보유 지분 중 일부가 은행 담보로 잡혀 있어 당장 처분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글로비스는 ‘주식 등의 대량보유상황 보고서’(4월 27일)를 통해 정 사장 보유 주식 1195만 4460주(지분율 31.88%) 중 130만 주가 우리은행에 담보로 맡겨져 있다고 공시한 바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