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구 전 금호석유화학부문 회장 | ||
지난 1일 토요일 아침. 두문불출하던 박찬구 전 회장이 박삼구 명예회장 자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연락조차 두절됐던 형제가 담판을 짓기 위해 비밀리에 만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 전 회장은 “석유화학 부문을 떼어내서 독립하는 것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 짓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박 명예회장이 이를 일축하며 협상은 결렬된 것으로 전해졌다. 박찬구 전 회장의 한 측근은 “여러 대응책을 고민하던 박 전 회장이 ‘형님에 대한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해 만남을 요청했지만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벌어진 뒤였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박 전 회장을 만난 뒤 자신의 고향이자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탄생한 광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고 박인천 창업주의 묘소에도 들렀다고 한다. 재계에서는 박 명예회장의 고향방문을 그동안 형제의 난을 치르면서 고단해진 심신을 추스르고 향후 있을 동생의 공세에 대한 대책을 구상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금호아시아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광주를 찾음으로써 총수일가의 ‘적통’임을 과시하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 명예회장과의 만남에서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한 박 전 회장은 주말 내내 서울 모처에서 자신의 변호인단 및 측근들과 함께 반격을 위한 최종 점검에 열중했다고 한다. 마침내 3일 월요일 오전, 박 전 회장은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반격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그룹 측에 의해 2시간여 만에 삭제됐지만 순식간에 언론 등에 퍼져나갔다. 많은 금호아시아나 직원들조차 사내 게시판에 박 전 회장의 글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접했을 정도였다. 글을 남긴 박 전 회장은 다시 ‘잠행모드’에 들어갔다.
박 전 회장이 이 글을 통해 밝힌 대응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이사회가 자신의 해임을 가결하는 과정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소집 자체가 불법이었을 뿐 아니라 해임안을 기습 상정한 것도 문제’라는 것이 박 전 회장의 주장이다. 이를 놓고 박 전 회장 측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법정으로 갈 경우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관례상 이사회 의결을 뒤집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도 박 전 회장이 법적인 문제를 들고 나올 경우 승산이 희박할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앞서의 박 전 회장 측근은 “활용할 수 있는 안이 많지 않은 박 전 회장으로서는 버리기 어려운 카드였던 것 같다. 또한 반전을 도모하기 위한 ‘시간벌기용’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박삼구 명예회장은 지난 7월 28일 기자회견에서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어 다툴 여지가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박 전 회장은 형제경영 위반에 대한 책임론도 거론했다. 박 전 회장은 ‘박 명예회장이 공동경영의 약속을 무시하고 경영권을 혼자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독단적으로 행사했기 때문에 그룹 전체에 엄청난 위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해임당한 것도 이러한 박 명예회장의 실책을 지적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 (좌)박삼구 명예회장 (우)박철완 전략기획부문 부장 | ||
마지막으로 박 전 회장이 들고 나온 것은 바로 박삼구 명예회장 아들 박세창 상무의 주식 불법거래 의혹이다. 박 전 회장에 따르면 박세창 상무는 금호석유화학 주식 매입대금 마련을 위해 금호렌터카와 금호개발상사에 금호산업 지분을 340억 원에 매각했다. 박 전 회장은 완전자본잠식 상태의 금호렌터카가 어떻게 170억 원이 넘는 금호산업 주식을 매입했고 금호개발상사가 왜 30억 원을 차입하면서까지 150억여 원의 주식을 매입했는지 의문을 나타냈다. 박 전 회장은 ‘이러한 불법적인 거래를 지시하였거나 관여한 책임자는 반드시 응분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이에 대해 금호아시아나는 “지분 매입 과정은 이사회를 통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됐다”고 반박했다. 금호렌터카의 경우 지난 7월 11일 금호오토리스 지분 100%를 국내 금융회사에 전량 매각했고 여기서 나온 195억 원 중 170억 원을 금호산업 지분 매입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금호아시아나의 한 관계자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공격거리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박 명예회장의 승리가 확실해진 듯하다”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박 전 회장의 박세창 상무 관련 의혹 제기에 대해 박 전 회장이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일종의 전초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 전 회장 측은 최근 검찰 및 금융권 인사 등을 접촉하며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박 명예회장에 대한 내부 정보들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일요신문> 899호 보도). 지난 8월 초 올라온 한 사정기관 보고서엔 금호아시아나 관련 내용만 10가지가 넘게 포함돼 있었다고도 한다. 향후 박 전 회장이 더욱 강력한 내용들을 폭로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당초 박 전 회장은 폭로전만큼은 자제한다는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룹 신뢰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동정적이던 사내 여론이 돌아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경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측근들의 요청이 거세지면서 결국 박 전 회장도 마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박 전 회장 측은 박 명예회장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을 글에 담을 작정이었지만 막판에 다소 수위를 낮추고 그 대상도 조카인 박세창 상무로 변경했다고 한다.
그룹 안팎에서는 박 전 회장이 금호석유화학 지분 경쟁에 나설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박 전 회장 부자는 현재 금호석유화학 지분율 18.47%로 최대주주에 올라있긴 하지만 다른 형제 일가의 지분을 합친 28.38%에는 못 미친다. 따라서 박 전 회장은 추가 지분 확보에 사활을 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박 전 회장이 지난 7월 21일과 24일 자신이 보유한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담보로 거액의 자금을 빌렸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 자금으로 향후 금호석유화학 지분 매집에 나설 가능성 때문이다.
또한 이사진 결의에 따라 의결권이 결정되는 자사주(22%)의 향배도 관심거리다. 현재는 이사회를 장악한 박 명예회장이 유리해 보이지만 박 전 회장은 금호석유화학에서의 공을 내세우며 역전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도 ‘금호석화의 임직원 및 주주의 이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겠다’며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또한 이사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지난 해임안 가결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형제간에 지분 경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경우 고 박정구 회장(박인천 창업주 차남)의 아들 박철완 그룹 전략기획부문 부장이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전망이다. 박철완 부장은 개인으로서는 최대인 금호석유화학 지분 11.76%를 가지고 있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박 명예회장 쪽에 선 것으로 알려진 박 부장이 만약 생각을 바꿔 박 전 회장 손을 들어준다면 박 전 회장 측의 금호석화 지분율은 30.23%로 박 명예회장 쪽을 압도할 수 있다.
이 때문일까.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1일 박철완 부장을 아시아나항공에서 그룹 본부로 발령을 냈다. 이로써 박철완 부장은 박세창 상무 밑에서 근무하게 됐다. 여기엔 박 명예회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박 명예회장이 박 부장을 지근거리에 두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박 전 회장 역시 박철완 부장을 아직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박 전 회장은 박철완 부장을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 등을 통해 설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철완 부장과 친분이 깊은 것으로 전해진 박 전 회장 아들 박준경 금호타이어 부장이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금호아시아나의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박철완 부장이 박 명예회장 편인 게 맞는 듯하다”면서도 “하지만 3세 경영 등 많은 변수를 고려할 때 장담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