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감독원이 황영기 회장에게 직무정지에 해당하는 징계 검토를 통보한 이유는 황 회장의 우리은행장 시절 투자한 파생상품 손실에 있다. 황 회장이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우리은행은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왑(CDS) 등 파생상품에 약 16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런데 이 금액의 약 90%에 해당하는 1조 6000억 원이 지난해 말 우리은행에서 손실 처리되면서 금감원이 그 과실 책임을 황 회장 등 당시 경영진에게 물으려는 것이다. 우리은행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사인 만큼 투자 손실에 대한 책임은 곧 ‘혈세 낭비’ 주범으로 몰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금융지주의 최대주주는 예금보험공사(예보)다.
금감원의 징계 통보 대상은 황 회장뿐만이 아니다. 황 회장에 이어 우리은행장에 취임했던 박해춘 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지난해 6월부터 행장직을 맡아온 이종휘 우리은행장도 금감원의 ‘주의적 경고’ 대상에 올랐다. 금감원은 징계 검토 대상에 올려놓은 우리은행 전·현직 행장들에게 2주간 소명 기회를 부여한 상태다. 이들이 제출한 소명자료를 참작해 오는 9월 3일 열리는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징계 수위가 결정될 예정이다. 만약 황 회장에 대한 직무정지 처분이 확정될 경우 황 회장은 향후 4년간 금융회사 임원으로 선임될 자격을 잃게 된다.
이와 관련, 황 회장 측은 “제재가 확정된 것이 아니므로 뭐라 딱히 입장을 내놓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일단 소명에 주력할 참”이라 밝혔다. KB금융지주 관계자는 “황 회장 재임 당시 투자과정은 경영전략상 정당했다”는 입장이다. 당시 우리금융이 매입한 상품들은 국내 대형 금융사들도 앞 다퉈 사들인 초우량 상품이었다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갑작스레 찾아온 바람에 황 회장 퇴임 이후 그 손실이 커졌지만 누구도 예상 못한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을 황 회장이, 이제 와서 직무정지 운운할 정도로 무겁게 지는 것은 과하다는 입장이다.
만약 제재심의위원회가 직무정지 카드를 뽑아들 경우 ‘금융사 임원 선임 금지 4년’의 적용기한을 어떻게 결정할지가 황 회장의 KB금융 회장직 수행 여부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KB금융 관계자는 “현직인 KB금융 회장직 수행에는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편 우리금융 최대주주인 예보 역시 우리은행에 대한 감사를 최근 단행했다고 한다. 금융권에선 예보가 금감원의 제재심의위원회 결과를 보고 나서 자체징계 여부를 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퇴임한 경영자의 책임을 이제 와서 얼마나 물을 수 있겠느냐’는 논란과 더불어 ‘현 경영진이 황 회장 등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의견까지 제기된다. 황 회장 퇴임 이후 커진 투자 손실에 대해 사후 책임을 직무정지 수준으로 묻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금융권의 화두로 떠오른 상태다.
일부 금융권 관계자들은 “황 회장의 실정 여부를 떠나 정적이 너무 많다는 점이 지금 같은 상황을 초래한 것”이란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황 회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금융권과 경제관료 집단을 주름잡았던 이른바 ‘이헌재 사단’ 일원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이헌재 사단 멤버 중 일부의 이름이 ‘김재록 게이트’ 사건 수사 당시 거론되면서 인적 구성에서 공통분모가 큰 ‘모피아’(재정경제부 출신 인맥) 세력과 이헌재 사단 일원들 간의 균열이 생겼다고 한다.
2007년 황 회장은 우리은행장 연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는데 이도 마찬가지 이유였다는 것. 우리은행 최대주주인 예보의 경영간섭에 맞서 소신 경영을 펼쳤던 것과 더불어 금융권과 관가에 널리 퍼져 있는 모피아 세력과의 불편한 관계 역시 황 회장의 연임 좌절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황 회장은 대선 직전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캠프에서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후로 줄곧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새 정부 출범 전후로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 등 경제 관료 인선 때마다 후보로 거론됐던 황 회장은 결국 지난해 9월 KB금융지주 초대 회장직에 오르면서 ‘낙하산’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이 같은 점은 현 정부하에서도 경제·금융 관련 주요 보직을 꿰차고 있는 모피아 인맥과 황 회장 간의 갈등설을 부추겼다. 1975년 삼성물산 입사 이후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을 거쳐 삼성증권 사장까지 지낸 ‘삼성맨’ 출신 황 회장에 대한 모피아 세력의 견제가 여전하다는 것이 금융권 일부의 시각인 셈이다.
삼성화재 상무 출신이자 한때 이헌재 사단 일원으로 분류됐던 박해춘 이사장의 지난해 6월 국민연금공단 입성과 관련, “뒷배가 황영기 회장일 것”이란 미확인 소문이 금융권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는 황 회장이 이헌재 사단의 후광을 접고 ‘황영기 사단을 세력화하고 있다’는 관측마저 낳았다. 이 모두 관가와 금융권을 주름잡아온 모피아 세력과의 갈등이 불가피할 것이란 시각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정치권과 재계 금융권 일각에선 최근 황 회장 관련 사태를 조만간 단행될 개각과 연관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관가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모피아 집단이 황 회장의 입각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힘을 썼다는 소문이 돌아다닐 정도다. 현 정부 세력 중 일부가 황 회장의 입지 확대를 견제하고 있다는 말도 금융권과 정치권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반면 “‘황영기 견제론’은 황 회장을 비호하기 위한 마타도어일 뿐”이란 시각도 엄연히 존재한다. 지난해 9월 KB금융지주 회장 취임 당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는 ‘황 회장이 우리은행 재직 시절 거액의 투자손실을 끼쳤다’며 인선을 반대한 바 있다. 황 회장이 ‘스타 뱅커’임엔 틀림없지만 우리은행 시절을 들어 그의 능력이 과대 포장돼 있다는 비판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황영기 회장이 과연 주변의 견제를 뚫고 ‘금융권 최강 검투사’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갈 수 있을까. 오는 9월 3일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 결과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