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방적 공기업 정책 중단하라” 한국노총 공공부문 노조 간부들이 지난 7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공기업 정책과 공공기관 중심의 비정규직 해고를 중단하라”며 규탄하고 있다.연합뉴스 | ||
최근 5년간 공기업 직원의 평균임금은 매년 4.5%씩 증가했다. 지난해 직원 평균임금이 6000만 원 이상인 공공기관은 전체의 62.5%에 달하는 185개였으며, 이 가운데 8000만 원 넘는 곳도 14개(4.7%)나 될 정도다. 문제는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순이익이 급감하는데도 이 같은 임금수준을 유지해왔다는 점. 정부는 이에 따라 연봉제와 임금총량제, 임금피크제 등을 도입해 기존 공공기관 직원의 임금을 줄여나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박차를 가해왔다. 특히 공기업 개혁에 대한 점수를 매겨 부진한 사장을 갈아치우거나 경고조치를 하는 등 임원진에게 무언의 협박(?)도 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없던 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공기업 경영진이 노동조합과의 마찰 등 때문에 임금체계를 손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업 노조가 물가상승과 연차 반납 등으로 사실상 임금이 깎였고, 최근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는 만큼 임금삭감 요인이 없다며 저항하자 꼬리를 내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석유공사는 3급 이상 간부직원들에 대해서 개별 동의서를 받아 임금의 2∼5%를 삭감했지만 4급 이하는 노조의 반대로 임금 삭감 추진이 중단됐다. 산업은행 등 금융공기업들은 산별인 금융산업노조와 사측의 임금협상 지연으로 기존 직원 임금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 사측은 신입직원 임금 삭감에 이어 기존 직원 임금 5% 반납을 제시했지만 노조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금보험공사는 기존 직원 임금 삭감 문제를 연초에 잠시 검토하다 백지화했으며, 한국거래소와 한국예탁결제원은 기존 직원 임금 삭감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여기엔 정부가 압력처럼 비칠 것을 우려해 기존 직원의 임금 삭감은 정부가 아닌 노사 간 합의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도 한몫했다. 한국철도공사와 수자원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은 기존 직원 임금 삭감문제는 정부의 지침이 없어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신입직원의 임금은 깎인 데 비해 기존 직원의 임금은 그대로 유지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공기업 중 대졸초임 인하 대상인 262개 기관이 모두 대졸 초임 삭감 방침을 결정했고, 그 중 243개 기관은 실제로 평균 15%의 초임을 삭감하는 보수규정을 개정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신입사원이 아니라 기존 공기업 직원들의 지나치게 높은 임금이 문제였는데 이를 바로 잡는 공공기관이 한 군데도 없다”며 “과거 사장들이 노조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을 늘리면서 회사는 손해를 보는데 직원은 높은 임금을 가져가는 기형적 구조가 여전하다. 정부가 공기업 임금협상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어 임금 삭감을 유도하는 여러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정부 일각에선 “공기업 사장으로 가 있는 재정부 출신 선배들 중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다”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기존 직원 임금삭감에 협조적이지 않는 공기업들은 신규채용이나 청년 인턴제 등에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 정책에 따라 정원감축 계획을 내놓은 상황에서 이에 맞추려면 신규채용이 어렵다는 논리에서다. 공기업 선진화 정책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으로 정원감축 계획을 발표한 공공기관 129곳의 정원 17만 5706명 중 2만 2364명을 2012년까지 감축해야 한다. 정부는 매년 자연감소분이 있고, 정원 조정도 2012년까지 하면 되는 문제라며 공기업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자산규모 5조 원 이상인 20개 대형 공공기관 중 하반기 직원 채용 계획을 내놓은 곳은 기업은행과 한국농어촌공사, 한국수력원자력 3곳뿐이다. 한국농어촌공사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미 채용과정이 거의 완료됐고, 기업은행만 200명의 채용 일정이 있어 실제 젊은이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일자리는 200개뿐이다.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는 10월 통합을 앞두고 있어 채용계획을 내놓을 분위기가 아니고, 지난해 100명 이상 뽑았던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산업은행, 한국중부발전 등도 채용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과 대한주택보증도 올해는 채용에 나서지 못했다. 게다가 수출입은행과 농어촌공사, 인천공항공사만이 청년인턴 계약연장 등을 추진하고 있어 지난해 하반기에 공기업에 들어온 청년인턴들도 대부분 재고용되지 못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이 경우 한국경제의 최대 복병인 실업률이 대폭 올라갈 수 있어 재정부 관료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