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 ||
정의선 부회장은 기아차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디자인 경영을 도입, 현대차와의 차별화를 꾀했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한 것이 대표적 사례. 한때 실적부진으로 갖가지 소문에 시달렸던 기아차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올 상반기 매출 8조 1788억 원, 영업이익 4192억 원의 사상 최대 실적을 이끌어냈다. 이 같은 가시적 성과 덕분에 정 부회장의 이번 승진엔 별다른 잡음이 따르지 않았다.
재계에선 정의선 부회장과 더불어 이정대 부회장과 김용환 김승년 두 사장이 당분간 현대차 운영의 중심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정대 부회장(54)은 그룹의 경영기획과 재무를 총괄하고 있으며 정 부회장을 제외한 최연소 부회장이다. 기획조정실장을 맡고 있는 김용환 사장(53)은 정몽구 회장의 최측근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세’다. 현대·기아차의 구매총괄을 맡고 있는 김승년 사장(53)은 정몽구 회장 비서실장을 15년간 지냈다.
그런데 이들이 정 부회장 중심의 ‘포스트 정몽구’ 시대를 열어젖힐 세대교체의 기수가 될 지는 미지수다. 전임 총수의 가신들과 그 주변세력의 존재가 황태자의 등극과 연착륙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시선을 다른 재벌가에서 종종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기인사 외에도 승진·보직이동 발령을 곧잘 단행하는, 정몽구 회장 특유의 수시인사 역시 올해 39세에 불과한 정 부회장 앞길을 터주기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수시인사로 기존 권력집단을 흩어놓아 정 부회장이 자파세력을 키우기 용이한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해석이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 재판으로 한동안 주춤했던 수시인사는 지난해 정몽구 회장이 광복절 사면을 받은 이후 이른바 ‘럭비공 인사’(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로 부활됐다. 지난해 9월 박정인 HMC투자증권 회장이 고문으로 물러나고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이 계열사 현대모비스로 전보 발령을 받으면서 정 회장 바로 다음 순위로 꼽혀온 두 거물급 인사가 그룹 중앙무대에서 발을 빼게 됐다.
정의선 부회장의 후원그룹이 될 가능성이 점쳐졌던 고려대 동문 인사들도 ‘럭비공’을 피해가진 못했다. 기존 부회장단 중 유일하게 정의선 부회장의 고려대 경영학과 선배였던 최재국 전 부회장은 지난해 말 현대차 기획·영업 담당 부회장직에 오르면서 ‘후계 역할론’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취임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지난 1월 고문직으로 물러났다.
▲ 2008년 9월 출시된 기아차 쏘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주도한 디자인 경영의 성공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
이와 관련, 현대차그룹 측은 “(정 부회장은) 기아차 경영 실적을 인정받아 부회장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면 된다”며 “우리 그룹 내엔 특정 계보나 인맥은 없다”는 입장이다.
‘정의선의 사람들’ 육성 못지않게 정 부회장의 부족한 지분율 늘리기도 승계구도의 주요 관건이다. 현대·기아차그룹 지배구조는 ‘현대차→기아차→모비스→현대차’로 이어지는 순환출자형태로 이 계열사들 중 한 곳만 지배하면 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선 부회장은 핵심 계열사들 중 기아차 지분 1.87%를 갖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재계에선 다른 계열사들에 비해 주가가 한참 낮은 기아차 지분 추가 확보를 통해 정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인프라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해왔다.
그런데 기아차 주가가 단기간에 너무 치솟는 바람에 정 부회장에게 필요한 실탄 역시 크게 불어나고 말았다. 최근 기아차 실적 개선과 제품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면서 지난 3월 초만 해도 6000~7000원 대에 불과했던 주가는 8월 25일 현재 1만 6800원까지 뛰어 올랐다.
정 부회장이 자신의 실탄창고로 평가받아온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 지분(690만 4500주, 지분율 31.88%)을 모두 팔면 기아차 지분 10.5%가량을 사들일 수 있는 금액이 된다(8월 25일 글로비스 종가 9만 4500원 기준). 지분 거래에서 발생할 거액의 세금을 감안하면 한 자릿수 지분율 확보용 실탄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 최근 정의선 부회장 승계구도에 영향을 미칠 법한 계열사 간 지분변동이 일어나 눈길을 끈다. 지난 8월 28일 현대모비스는 공시를 통해 현대제철이 보유하고 있던 현대차 지분 5.83%를 추가 매입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현대모비스의 현대차 지분율은 종전의 14.95%에서 20.78%로 높아졌다. 현대모비스가 공시를 통해 밝힌 지분 매입 목적은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이다. 장차 계열사 간 지분정리를 통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한 지주회사 체제로 내딛는 첫 걸음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현대모비스가 새 지주사가 될 경우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모비스의 지분만 확보하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현대모비스 주가가 14만 원대에 도달한 만큼 정 부회장이 거액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
일각에선 정몽구 회장의 현대제철 지분 6.96%와 정 부회장 명의 다른 계열사 주식을 맞교환하고 정 부회장이 추가로 모비스 지분을 매입해 새 지주사의 최대주주가 되는 방법도 고려된다. 그런데 이 경우 정 부회장 보유 비상장 계열사 지분의 적정주가 논란이 불거질 우려가 있다.
정 부회장 보유 지분은 부품 계열사 위스코 57.87%, 건설 계열사 엠코 25.06% 등 글로비스와 기아차를 제외하면 대부분 비상장 계열사들에 분포돼 있다. 이렇다 보니 현대모비스와 정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글로비스의 합병을 통해 정 부회장이 통합법인의 최대주주로 등극할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재계에선 “(정의선) 부회장 승진이 전격 단행된 이상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을 택할 것 같진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정 부회장 승진과 더불어 그룹 내 세대교체 흐름의 가속화가 예상되는 만큼 재계에선 정 부회장이 어떻게든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지분의 조기 확보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