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는 맹랑한 부하직원, 위로는 고압적인 상사가 버티고 있다. 아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상사의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특히 남성 부하직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상사가 돼도 외로운 여성 상사가 많다. 똑같은 일을 해도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술자리 안주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다.
여성이라는 ‘신분’으로 어렵게 요직을 맡게 돼도 부하직원 통솔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사들은 의외로 많다. 직장 문화에 많은 변화가 왔다고는 하지만 여성을 상사로 모시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다. 여성 상사들은 이유도 모른 채 남성 상사들과의 차별대우를 감내해야 할 경우가 많다.
특히 남성 부하직원의 경우 그 태도차이가 심하다. 광고기획사에 근무하는 J 씨(여·34)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차별을 하는 부하직원 때문이다.
“하루는 직원 몇 명이 회의실에 모여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데 입사 1년차인 부하직원이 들어왔어요. 다른 남성 상사한테는 인사를 하는데 저는 본체만체하더군요. 보다 못한 다른 직원이 지적을 하니까 저보다 더 높은 상사가 있기 때문에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인사를 떠나서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옳은 건 아니잖아요. 너무 어이가 없었죠.”
J 씨는 이후에도 자신이 업무 지시를 수차례 했을 때는 겉으로만 ‘예, 예’ 하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른 남성 상사가 같은 지시를 했을 때는 번개같이 처리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 그는 “똑같이 경쟁해서 오른 자리인데 부하직원에게 심한 차별을 받을 때는 화가 나면서 속상하다”며 “엄하게 해야 할지, 달래고 어르면서 가야 하는지 늘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여성 상사들은 업무지시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남성 부하직원 때문에 본의 아니게 평소 성격과 다른 모습으로 회사 생활을 하기도 한다. 문구전문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O 씨(여·33)는 회사에서 엄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무서운’ 상사다. 쉽게 틈을 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사실 애교도 많고 다정다감한 성격인데 회사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더라고요. 다른 회사에서 근무할 때 무단결근하는 부하 직원에게 경고를 줬는데 짜증을 내더군요. 다른 남성 상사가 엄포를 놨을 때는 식은땀까지 흘리던데요.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했죠. 회사에서 인기관리를 할 것도 아니고 지금은 이 모습이 편해요.”
O 씨는 태도를 달리한 이후에야 남성 부하직원에게 명령조의 업무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이전에는 자신을 무시한다며 발끈하는 부하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있다. 부드러운 모습을 감추고 카리스마 있게 철저히 업무적인 태도로 일에만 매진하자 업무지시가 먹혔다.
그는 “사실 원래 모습을 감춘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며 “말투부터 행동거지까지 평소와 완전히 다르게 해 마치 이중생활을 하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 영화 <7급 공무원> | ||
여성 상사가 불리한 대표적인 이유는 ‘여성’이라는 것과 술자리에 약하다는 것이다. 상사가 여성일 경우 일부 부하직원들은 자신들의 상사라는 것을 망각한 채 가볍게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벤트 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32)는 능글맞은 부하직원 때문에 옷차림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회사 분위기상 딱딱하게 대하기보다는 직원들끼리 다들 좀 편하게 지내는 편인데 한 부하직원은 도가 넘더라고요. 지시를 내리면 ‘에이, 힘든데 팀장님이 좀 하시죠’라면서 농담조로 거부하질 않나, 복도를 걸어가면 어느 새 나타나 옆에 지나치게 딱 붙어서 능글맞게 대화를 건네요. 옷이 조금만 화려하거나 목이 파여도 금세 ‘스타일 죽인다’는 둥 가볍게 굴어서 옷도 답답한 디자인만 입게 되죠. 엄연한 상사인데 업무시간에도 사적인 질문을 마구 던져서 곤란할 때도 많았고요. 처음부터 편하게 대해준 것이 화근이었어요.”
상사를 상사가 아닌 여성으로 보는 부하직원 때문에 K 씨는 화가 날 때가 많지만 갑자기 정색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어느 날부터 차갑게 변하면 오히려 그 직원을 신경 쓰는 것처럼 비칠까 싶어 별다른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다.
그는 “한 번에 제압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나 자신이 못나 보일 때도 있다”며 “업무적인 문제가 아닌 온전히 혼자 해결해야 할 몫이라 고민만 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여장부가 되지 않으면 여성 상사로 사는 것이 녹록지 않다. 큰소리치면서 거세게 나가고 술자리에서도 끝까지 남아 부하직원들을 휘어잡아야 인정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 대부분의 여성 상사들은 특히 술자리 회식문화가 어렵기만 하다.
자동차 회사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는 C 씨(여·35)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지만 작고 여린 몸에 회식자리를 끝까지 버텨내는 게 늘 버겁다.
“부하직원과 사소한 트러블이 있을 때 업무시간에 따로 시간 내서 이야기를 해도 부담스러워하기만 할 뿐 진정한 ‘해소’는 없는 것 같아요. 남성 상사와는 술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서로 쌓인 감정도 풀고 하며 더욱 돈독해지는 게 눈에도 보일 정도죠. 하지만 저는 날이 갈수록 지극히 업무적인 관계로만 고착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서로의 앙금을 말끔하게 풀어야 일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끝까지 남아있어 보려고 했지만 끝없이 들이붓는 술에 여자 얘기만 잔뜩 해대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그렇다고 부하직원들에게 차 한잔 하자고 할 수도 없다. 그러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그런 자리 자체를 부하직원들이 달가워하지도 않는다고.
C 씨는 “모든 사회생활이 원만한 인간관계에서 출발하는 건데 그게 대부분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것이 안타깝다”며 “아무리 진심으로 대해줘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최근의 기업 문화에서 신세대 직원들을 대변하는 이미지는 ‘개인주의’다. 함께 공유하는 문화보다는 자신의 안락함이 우선이다. 정시 퇴근과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등 때문에 상사들은 골치가 아프다. 여기에 더해 여성 상사들은 남성 상사와의 차별 대우로 인해 이중고를 겪는 셈이다.
한 기업문화 전문가는 “남성 부하직원들은 대체로 여성 상사를 윗사람이 아닌 회사 동료로만 인식하거나 언젠가는 뛰어넘을 경쟁자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며 “감정적인 면에 호소하기보다는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존경심을 유발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이다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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