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임직원들과 노조가 대치하는 모습. | ||
민주노총 산하 금속연맹 소속 쌍용자동차 노조는 지난 8일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조합원 73.1%의 찬성으로 민주노총 탈퇴안을 가결시켰다. 쌍용차 노조의 탈퇴는 지난 95년 민주노총 설립 이후 완성차 업체 노조로는 처음이다.
쌍용차 노조의 민주노총 탈퇴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완성차 업체들이 소속되어 있는 금속연맹은 민주노총 내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산하 단체다. 완성차 업체의 탈퇴는 곧 금속연맹의 영향력 저하를 불러오고 이는 민주노총의 원동력 자체를 감소시킨다.
민주노총의 균열 조짐은 비단 금속 연맹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달에는 정보기술 산업연맹 산하 KT 노조도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KT 노조는 3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는 거대 노조다. 이렇게 민주노총을 탈퇴한 노조가 올해만도 벌써 19개에 이른다. 민주노총에 그야말로 위기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굴욕’은 올해 초부터 계속돼 왔다. 민주노총은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극에 달한 반정부 여론을 등에 업고 화물연대 파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는 민주노총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화물연대 파업에 여론은 싸늘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자 시간이 갈수록 파업에 참여한 차주들이 줄어들었고, 화물연대 집행부는 계약 해지자 문제만 마무리 짓고 닷새 만에 파업을 종료했다.
올 노동계 최대의 화두였던 쌍용차 파업 문제와 관련해서도 민주노총은 ‘악수’를 두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장기간의 무장투쟁까지 주도했지만 이는 오히려 여론 악화만 불러왔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KT 노조와 쌍용차 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한국노총과 더불어 노동계의 양대 산맥인 민주노총이 왜 이런 위기를 맞게 된 것일까.
전문가들은 가장 큰 이유로 노동 현장 중심의 현안이 아니라 정치적인 투쟁 노선을 채택하는 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 만약 정치적인 쟁점이 불거져 나오면 민주노총은 산하 연맹에 파업 지침을 하달하게 되고 연맹 소속 노동조합은 당연히 상급 기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시민·노동운동의 생명과 같은 도덕성의 하락도 위기를 불러온 하나의 원인이다. 올 초에 불거졌던 조합원 간부 성폭력 사건은 민주노총의 도덕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보수 언론은 이를 빌미로 민주노총 정체성을 물고 늘어졌고 결국민주노총 활동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민주노총의 구성 자체가 대기업 노조 위주로 꾸려져 있다는 것도 전체 노동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노조 지도부가 권력화된 것도 노동운동이 변질된 또 다른 이유라는 지적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노조 지도부-노조위원장-울산 지역구 구청장-정계 진출’이 노조위원장에 출마하는 후보들 대다수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로드맵’이기 때문에 노조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후보들 간의 경쟁이 과열양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해관계가 맞는 노조원들 간에 계파가 형성되고 계파 간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의도한 결과는 아니지만 노조원들의 복지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게 대기업 노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비단 현대차 노조뿐만 아니라 거대 기업 노조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민주노총을 진작에 탈퇴한 일부 거대 기업 노조의 경우 사측과의 원만한 대화로 인해 실리를 더욱 많이 챙기는 사례가 나타나는 것도 노조들의 민주노총 탈퇴를 부추기고 있다.
예를 들어 5년 전 민주노총을 탈퇴한 현대중공업 노조의 경우 금속노조에 내야 하는 조합비를 아껴서 노조원 휴양지 부지를 매입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렸고, 민주노총 설립 후에도 강경 투쟁을 주도했던 곳이다. 또한 올해 들어 민주노총을 탈퇴한 19개 기업 및 사업장 노조의 위원장들은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조합원의 권익향상에 집중하겠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민주노총을 탈퇴하는 노조의 이 같은 움직임은 과거 노동운동이 정치적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여론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면 현재의 노동운동은 노조 자체의 실리를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로 인해 민주노총은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고 이제는 조직 와해를 걱정해야 할 위기에 놓여있다.
더 큰 문제는 ‘위기’가 코앞까지 밀어닥쳤지만 자성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11일 대의원대회를 열었지만 위기를 벗어날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진보정당의 통합과 단결투쟁이라는 식상한 구호만을 외쳤을 뿐이다.
민주노총은 광복 이후 50년간 노동계를 장악해 온 한국노총 단일 체제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1995년 결성됐다. 민주노총은 당시만 해도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받았던 한국노총과 대비되면서 현장 노동자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또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민주화 세대의 적극적 지지를 받으며 한때 한국노총을 제치고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성장의 동력이었던 투쟁과 이념은 거꾸로 조직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로 변했고 이로 인해 민주노총은 ‘위기의 계절’을 맞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