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프라이빗뱅커들이 판매 상품의 수익률 부진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2010년 초 증권사들 사이에서는 자산관리영업이 대세로 통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공모형 펀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서민들과 다른, ‘그들만의’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은행 PB가 대세였지만 저금리 상황이 계속되면서 은행보다는 높은, 그러면서도 꽤 높은 수익 확률을 가진 증권사 투자 상품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매개는 ‘랩어카운트’가 해줬다. 30~40종목, 많게는 50종목 넘는 포트폴리오로 ‘화끈한’ 수익이 어려웠던 일반 펀드 대신 10종목 이내에 투자한다는 점이 랩어카운트의 매력. 한두 종목만 떠도 수익률은 단번에 급상승했다. 증권사로서는 상품 판매 수수료에 주식거래 수수료까지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펀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랩어카운트는 가입금액에 제한이 있는 PB 고객만의 상품이었다. 초특급호텔에서 잇따라 고액 자산가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전국 순회 설명회가 이어지며 지방의 고액 자산가들까지 앞 다퉈 랩어카운트에 돈을 넣었다.
‘차·화·정(자동차 화학 정유)’ 주가 급등과 함께 몰아친 랩어카운트 열풍은 그러나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2011년 봄 유럽발 재정위기로 주가가 급락하면서 랩어카운트 수익률이 곤두박질친 것. 오를 때는 펀드보다 화끈했지만, 내릴 때도 펀드보다 훨씬 큰 폭의 손실을 보이는 게 랩어카운트의 특징. 미리 시장 흐름을 조언하지 못한 PB들은 고객의 질타를 들어야 했다. 한 증권사 PB의 당시 회고다.
“사실 PB가 시장 전문가는 아니다. 시장이 어떻게 될지는 리서치센터나 사내 투자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이를 고객에게 알려주는 게 PB의 역할이다. 그런데 당시 전문가들이 시장에 대한 경고를 제때 해주지 못했다. 경쟁사와 대비해서 얼마만큼의 투자금을 유치하고, 회사 수익에 기여하느냐가 성과급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보니 고객 서비스와 상품 마케팅에는 신경을 쓰지만, 정작 투자 사후 관리에는 소홀했다.”
2011년 상반기를 의기소침하게 보냈던 PB들이 다시 움직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 해 하반기. 이번 상품은 해외 채권이었다. 브라질을 비롯한 신흥국채권이 주요 투자 대상이었다. 특히 브라질채권은 10% 가까운 연이자율에 한-브라질 이중과세협약에 따른 세금혜택까지 있어 고액 자산가들의 귀가 솔깃할 만했다.
신흥국채권의 성공에 힘입어 기운을 차린 PB들은 2012년부터 장기채권 판매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가연동채권, 신흥국채권에 이어 채권으로만 ‘3연타석 홈런’을 칠 것이란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심드렁해진 주식시장에 실망하고, 신흥국채권으로 채권투자의 맛까지 본 PB 고객들은 은행예금보다 나은 수익률에 안정성, 분리과세의 세제혜택까지 갖췄다는 장기채권에 다시 목돈을 넣는다. 특히 이 해 가을에 처음 나온 30년 국채는 PB들의 전략상품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채 1년이 가지 못했다. 5월 들어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가 가시화되면서 브라질 등 신흥국 금리가 급등했고, 이들 나라가 발행한 채권값이 폭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채권금리도 급등하면서 장기국채 수익률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같은 금리상승에 대한 조짐을 PB들은 감지하지 못했다. 한 대형증권사 PB의 말이다.
“사실 증권사에 주식 전문가들은 수두룩하지만, 채권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개인 고객에게 채권투자를 조언해줄 만한 인력은 별로 없고, 해외채권이나 장기채권에 전문성을 가진 이는 더욱 없다. 회사를 통틀어서 이런 정도인데, PB들 가운데 전문가가 있을 턱이 없다. 설마설마 했는데 금리 급등으로 채권수익률이 급락하고, 고객들은 앞 다퉈 투자를 회수하고 있다. 이제 다른 투자 상품을 권유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운용본부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국내 채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초보로 통하는 모 증권사 해외채권 담당자가 조 단위의 리테일 채권을 담당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하물며 해외 채권인데. 또 장기채를 일반인들에게 판매한다고 할 때도 깜짝 놀랐다. 채권의 만기가 길다는 것은 그만큼 금리 리스크가 크다는 뜻인데, 이를 마치 물건 팔듯이 팔았다. 정부가 장기국채를 찍으면서 증권사들에게 밀어냈는데, 증권사들이 이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고객에게 넘긴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이젠 고액 자산가들도 증권사 PB에 더 이상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한 증권사 PB 고객의 말이다.
“고액 자산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안정적으로 자산을 보호하느냐다. 그래서 최고 관심사가 절세다. 하지만 저금리가 계속되면서 일부 위험자산 투자로 전체 자산의 수익률을 올리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증권사와 거래했는데, 겪어보니 투자 판단을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긴축정책 전환 발표로 당분간 주식과 채권시장에서의 혼란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PB들의 수난시대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최열희 언론인
“투자조언 유료화 어때요?”
“고객들이 PB에 원하는 것은 시장흐름이나 재테크 트렌드, 제도변화 흐름 등을 먼저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하지만 대고객 서비스와 투자 전문성을 동시에 갖추기란 참 어렵다. 전문가와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것도 역할이지만, 훌륭한 전문가를 가려내는 능력이 부족한 때가 많다.”
‘수난시대’를 맞고 있는 한 PB의 ‘자아비판’이다. 때문에 PB들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행법상 금지돼 있는 투자조언 유료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한 증권사 PB 담당 임원은 “국내 PB의 수익은 금융상품이나 주식을 판매했을 때의 수수료에서 발생하지만 선진국에서는 고객에게 투자조언을 해주는 자체에서 수익이 발생한다”면서 “수수료는 고객이 돈을 벌건 잃건 발생하지만, 투자조언의 대가는 고객이 투자성과를 냈을 때 극대화된다. PB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결국 고객 성과와 연동되는 수익모델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