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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추석에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만두를 먹으면서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XX 신문사(또는 방송사)의 ○○○ 기자시죠?”
“예, 그런데요?”
“저는 기획재정부(또는 통계청)의 △△△입니다. 오늘 쓰신 물가 관련 기사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기사에 쓰인 통계자료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물가지수에 포함된 각 품목마다 가중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부만 빼서 쓰시면 전체적으로는 안정됐는데 마치 크게 오른 것같이 보입니다. 기사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은 아니고요, 요즘 물가가 많이 안정되고 있는 것이 큰 흐름이니까, 다음에 기사 쓰실 때 꼭 좀 고려해주십시오.”
최근 물가와 관련한 기사를 쓴 기자들이 받았다는 전화 통화 내용이다. ‘물가가 올라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졌다’거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 식료품 물가가 가장 많이 올랐다’는 등 ‘사실’을 쓴 기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정부가 물가 관련 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셈이다. 재정부나 통계청 공무원들이 이처럼 물가 기사에 노이로제를 보이는 데는 여러 가지 고민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친 서민정책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지지율이 10%대까지 급락하며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 집권 초기부터 밝혔던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각종 감세 정책에 대해 ‘부자감세’라는 비난이 겹치면서 레임덕에 빠지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금융위기를 다른 나라보다 가장 빨리 헤쳐 나가면서 지지율이 서서히 오르더니 지난 7월 친 서민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뒤로는 지지율이 50%를 넘나들고 있다. 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친 서민·중도실용’을 다시 한 번 밝혔고, 9월 30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서도 이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할 정도로, 속된 말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 서민행보 노선 등에 민주당이 너무 안이하고 관성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않느냐”며 “이 대통령의 행보를 사기, 위장으로만 안이하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 민주당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 대통령의 친 서민행보는 정치권에서 큰 화두 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 관련 기사, 그것도 서민들에게 민감한 ‘장바구니 물가가 올랐다’는 식의 기사는 공무원들에게는 이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특히 이 대통령이 집권 초기부터 52개 생필품에 대한 특별 관리를 지시, ‘MB물가지수’까지 만들어져 있어 물가 관련 기사는 아플 수밖에 없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물가 관련 기사가 나오면 기사가 맞든 틀리든 위에 보고를 해야 한다. 최근처럼 상승률이 높게 나타난 일부 품목을 중심으로 기사가 나오면 해명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통계 자료가 틀린 것이 없는 만큼 기자들에게 ‘다음에는 잘 좀 써달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물가 기사에 민감해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목하 고심 중인 출구전략(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시중에 풀어놓은 자금을 회수하는 전략)의 시기와 관련이 있다. 경기침체에 현금을 마련하지 못해 무너지는 기업이 없도록 시중에 자금을 잔뜩 풀어놨는데 이것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면 없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는 속도와 물가 상승 속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출구전략 시기를 찾고 있다. 그러나 요즘의 경기회복세가 민간보다는 정부가 추진한 각종 공공사업에 의한 것이다 보니 자금을 일찍 회수할 경우 경기회복의 불씨가 꺼질 수 있어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가 오른다면 진퇴양난에 빠지는 셈이다.
추석을 앞두고 장바구니 물가를 잡느라 다른 해보다 전력을 기울인 것도 이 때문이다. 추석을 목전에 뒀던 올해 9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2.2% 올라 역대 9월 물가 중 두 번째로 낮은 상승률을 기록, 정부 관계자들을 안도시켰다. 그런데 최근에는 집값이 들썩거리면서 다시 공무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출구전략에는 또 재정부와 한국은행의 주도권 다툼도 얽혀 있다. 한국은행 본관 로비 벽에는 ‘물가안정’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한국은행의 핵심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과거 ‘재무부(현 재정부)의 남대문출장소’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정부 경제정책에 맞춰 통화정책이 춤췄던 탓이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은 뒤 국제통화기금(IMF)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한국은행법이 개정되면서 독립성이 보장되고, 물가안정이 목표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현재 한국은행은 금융위기로 불거진 경기침체에 대응해 소비와 투자를 늘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최저치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물가에 이상이 생기면 기준금리를 올려 통화를 회수해야 한다. 출구전략의 시작인 셈이다. 호주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에 대해 각국 언론이 ‘세계 출구전략의 시작’이라고 보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지금까지 한국은행은 물가 상승과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며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수차례 내비쳐왔다. 그때마다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물론, 이 대통령까지 나서 ‘출구전략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억눌러왔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가 뛰고 있다’는 보도가 지속되면 한국은행에게 기준금리 인상의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 국제 투자은행(IB)들이 한국 물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돼 조기 금리인상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어 그나마 공무원들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다. 크레딧스위스는 최근 “한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저점에 다다랐으나 내년 2분기까지는 유가가 급등하지 않는 한 뚜렷한 물가상승 움직임이 나타나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골드만삭스도 “물가 상승세가 완만하고, 글로벌 경기침체 대한 불확실성 및 4분기 중 재정부양 효과 감소 등을 감안하면 출구전략 시행 시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고, 모건스탠리와 도이체방크 등 다른 IB들도 물가가 안정돼 금년 중에 금리인상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이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 IMF가 우리나라의 물가 상승률을 선진 33개국 가운데 상위층에 포함시킨 탓이다. IMF는 우리나라의 올해 물가 상승률이 2.6%로 아이슬란드(11.7%) 이스라엘(3.6%)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선진 33개국 평균치인 0.1%보다 크게 높은 것이다. 문제는 IMF가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 순위를 2010년에는 33개국 중 2위(2.5%), 2014년에는 33개국 중 1위(3.0%)로 순위를 높여나가는 데 있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가 위기 극복을 가장 빠르게 하겠지만, 소비자 물가가 경제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라고 지적한 셈이다.
이준석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