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직장인의 서랍 속은 비상식량, 화장품, 하이힐 등 갖가지 물건들로 가득하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그녀들 서랍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흔한 것은 먹을거리다. 늦은 오후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비상식량’은 필수 품목. 때문에 그녀들의 서랍은 컴퓨터 키보드와 전화기에 버금가는 세균의 온상지가 되기도 한다. 식품회사에 근무하는 H 씨(여·29)의 서랍에는 커피에 곁들일 수 있는 과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주로 오전에 회의를 많이 하는데 점심시간이 지나면 진이 빠져요. 졸음 100%죠. 이럴 때 커피를 마시는데 과자를 곁들이면 훨씬 낫잖아요. 개인적으로 사 놓은 거라 책상 위에 두면 이래저래 하나씩 집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랍 속에 넣었죠.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져 금세 지저분해지지만 포기할 수 없는 아이템이에요.”
같은 부서 L 씨(여·27)의 서랍에도 주전부리가 들어 있다. 종류는 좀 다르다.
“야근할 때가 많은데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 따로 저녁을 먹기보다 식이조절용 ‘에너지바’를 먹어요. 언제 야근을 하게 될지 몰라 항상 구비하고 있죠. 사무실 공용 녹차나 둥굴레차 티백은 인기가 있어 금방 떨어지기 때문에 여분으로 챙겨두는 편이고요.”
먹을 것보다는 좀 더 특별한 것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이벤트기획사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K 씨(여·28)의 서랍에는 꼼꼼한 성격답게 자잘한 물건들이 한가득하다.
“빨대나 1회용 비닐봉지와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은 넉넉하게 준비해 둬요. 당장 필요한 건 아닌데 꼭 갑자기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뭣 하러 그런 걸 챙겨놓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쉬울 땐 꼭 저를 찾죠. 따로 사는 건 아니고, 아침에 우유배달 하는 분한테 얻기도 하고 그때그때 생각날 때마다 모아요.”
비상대비 물품도 K 씨의 서랍 한 편을 차지한다. 상비약은 기본 중의 기본. 소화제와 진통제 감기약 연고 1회용 밴드 등이 들어 있는 작은 약통을 만들어 놓았다. 자주 쓰는 문구용품도 빼놓지 않고 챙겨둔다. 메모지나 펜은 물론 디자인이 눈에 띄는 문구로만 책상 서랍 한 칸을 채웠다. 그는 “서랍이 예쁜 문구용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며 “제법 많이 남았을 때도 비어있는 느낌이 나지 않게 늘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오로지 여성만이 갖고 있는 물건들도 그녀들의 서랍을 차지한다. 가구회사에 근무하는 L 씨(여·30)의 서랍은 전형적인 여성 직장인의 특징을 보인다.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 데다 회사 근처 헬스클럽에 운동하러 갈 때도 종종 있죠. 그럴 때를 대비해서 기본적인 화장품을 샘플 위주로 챙겨놨어요. 갑자기 저녁에 약속이 생기면 낭패거든요. 간단하게라도 다시 화장을 해야 하니까요. 머리핀이나 고무줄도 당연히 들어 있고요. 색상별로 스타킹도 준비했죠. 구멍이 나거나 올이 나갈 수도 있어서요.”
L 씨의 직장동료 N 씨(여·30)도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물건이 들어있다. 바로 ‘힐’이다.
“저는 평소에 굽이 1㎝ 정도 되는 신발을 주로 신는데 계획에 없는 거래처와의 미팅이 잡히거나 모임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7㎝ 정도 굽의 힐을 준비해 둬요. 신발 하나만 바꿔 신어도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옷에 잘 맞는 블랙 컬러로 ‘비상사태’를 대비하죠.”
때로 비밀스런 물건도 서랍을 차지하게 된다. 생리대나 물티슈, 진통제 등은 거의 모든 여성 직장인들이 갖고 있어 사실 그다지 비밀스럽지는 않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J 씨(여·25)는 회사는 물론 집에서도 금기시되는 물건을 서랍에 감춰뒀다.
“대학 때부터 담배를 피웠어요. 요새 여성 흡연자들도 많고 해서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이 알면 걱정하시고 회사에서는 괜히 말이 나오면 성가셔질까봐 비밀로 하고 있어요. 집에 두면 엄마가 볼 수도 있지만 회사에서는 다른 사람 서랍은 거의 만지지 않기 때문에 더 안전하죠.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면서 가끔씩 피우는데 중간에 떨어지면 사러 나가기가 애매해서 미리 좀 챙겨두는 편이죠.”
지난해 결혼해서 임신 중인 M 씨(여·28)는 중소기업에 근무한다. 대기업처럼 육아 휴직제도가 잘 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고민이 많다.
“같이 근무한 지 꽤 돼서 설마 문제가 될까 싶었는데 막상 결혼하고 임신을 하니까 윗분들 눈치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계속 농담 반 진심 반으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는데 안 되겠다 싶어 사표를 썼죠. 근데 막상 내려니 당장 아쉽고 해서 서랍 안쪽 깊숙이 넣어놨어요. 출산일이 가까워지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하죠. 모르긴 몰라도 저 같은 분들 많을걸요.”
서랍 속에 즐거운 근무시간을 위한 물품을 넣어두는 직장인들도 많다. 점심시간 틈틈이 혹은 퇴근 후 약속시간까지 마땅히 할 일이 없을 때 사용하는 것들이다.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25)의 경우도 그렇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 시간이 좀 남는 편이에요. 산책을 가기도 하는데 바로 올라와서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더 많죠. 그럴 때 미리 준비해 둔 휴대용 게임기를 이용하면 잠도 달아나고 시간도 금방 가죠.”
O 씨는 게임기 외에 공부할 책도 넣어 놨다. 업무시간 이후라도 눈치가 좀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영어인 데다 눈치 봐가며 조용히 공부하기 때문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고. 그는 “책이나 게임기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서랍 속에 두고 다닌다”며 “다른 동료는 점심 때 옥상에서 운동한다고 줄넘기랑 가벼운 아령을 넣어둔다”고 전했다.
직장은 제2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늘 필요한 물건들이 늘어나면서 처음에는 여유가 많았던 공간도 점점 채워지기 시작한다. 굳이 넣어둘 필요가 없는 물건들까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므로 점점 포화상태가 된다.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S 씨(34)는 후배 여직원의 서랍 정리 광경을 보면서 놀랐다. 그 작은 공간에 그렇게 많은 물건들이 들어가 있는지 몰랐단다.
그는 “명함 전선 문구용품 휴지 과자 철 지난 다이어리 등 온갖 것이 들어가 있었는데 정리하면서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던 직원의 말에 놀랐다”며 “남자들보다는 확실히 다양한 품목들이 서랍 속에서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