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정부의 정책 추진에 가장 큰 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보건복지가족부다. 재정부가 내수 확대를 위해 추진 중인 서비스산업 선진화 중 최우선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의료산업선진화가 전재희 복지부 장관의 뚝심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전 장관의 지휘를 받는 복지부의 강력한 반발에 의료선진화의 두 축 중 하나인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판매가 무산됐고, 또 다른 축인 영리의료법인 도입은 시한을 넘기며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으로 열린우리당 바람이 불던 17대 총선 당시에도 한나라당 내에서 생환을 걱정하지 않았을 정도로 영향력과 파워가 강한 전재희 의원이 복지부 장관을 맡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우려가 현실로 바뀐 셈이다.
재정부는 윤증현 장관 취임과 더불어 의료선진화의 큰 흐름으로 일반의약품 편의점 판매를 추진하려 했으나 복지부의 반대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윤 장관은 수시로 “외국에서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의약품을 팔고 있고, 휴일에도 편의점을 이용할 수 있어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며 도입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전 장관이 부임 직후 ‘원점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힘을 잃었다. 지난 12일 정부 용역을 맡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청회에서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해야한다’고 발표했으나 현실화는 어려울 전망이다.
영리의료법인 도입을 둘러싼 논란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재정부는 각종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국내 고소득층을 붙잡고, 외국 의료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영리의료법인이 필수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복지부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라는 큰 틀이 훼손될 수 있고, 의료 양극화를 불러올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이 문제는 재정부와 복지부가 지난 5월 KDI와 보건산업진흥원에 공동 연구용역을 맡긴 뒤 결과물을 보고 도입 여부를 결정하기로 타협하면서 물꼬가 트이는 듯했다. 당시 재정부는 논의의 장으로 복지부를 끌고 나오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며 공동 연구용역 합의에 전력을 다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전 장관과 복지부가 영리의료법인이라는 링으로 올라오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일을 추진할 수가 없다. 향후 논의에서 일부 내용이 바뀌더라도 우선은 전 장관과 복지부를 영리의료법인 논의에 끌어들이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월 28일 제출될 예정이었던 공동 용역보고서는 영리병원 도입에 따른 장점을 제시하는 데이터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11월 말로 제출 시기가 한 달 연기됐다. 재정부로서는 그나마 한숨을 돌린 셈이지만 한 달이 지난다고 해도 더 나은 보고서가 나올 가망성이 적은 데다, 보고서가 개선된다고 해도 내용의 공정성을 문제 삼을 가능성이 높아 실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영리의료법인 도입은 어려워질 전망이다.
복지부만 재정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재정부는 지난 11일과 12일 ‘전문자격사 시장 선진화를 위한 공청회’를 열고 일반인의 병원 및 법무법인 투자허용, 전문자격사 간 동업 허용 등의 개혁안을 공개했다. 이에 변호사와 법무사 단체들은 ‘일반인의 법무법인 지분 소유 허용’과 ‘각 단체의 회원가입 의무화 폐지’라는 정부 방침에 강력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또 약사회 등도 면허 없는 일반인에게 전문 업종 진입을 허용하는 것은 면허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 ||
그러나 발표 초기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임투세액공제 폐지시 내년도 설비투자가 3.5% 감소할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여야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기에 정치인 출신인 최경환 지경부 장관이 최근 “임투세액공제 폐지 문제, 이건 재고해야 된다. 지금 설비투자가 안 이뤄지고 있다”며 재정부 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친 박근혜계’를 대표해 입각한 최 장관인 만큼 당정 중 어디에서도 최 장관의 주장에 반격을 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재정부가 임투세액공제 폐지 등으로 이명박 정부가 공언해온 감세정책을 철회하는 듯한 인상을 희석시키기 위해 추진하던 법인세 및 소득세 감세 시행은 여야뿐 아니라 아예 신임 국무총리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정운찬 총리가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 경제분야 대정부 질의에서 “소득세에 대해서는 세율 인하 방침을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총리로서의 생각”이라고 밝혀 정부 차원 입장임을 분명히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연봉 1억 원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과표구간을 신설, 35%의 소득세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론으로 돼가고 있는 등 재정부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셈이다.
여기에 복권 수익금 문제를 놓고 제주도와 각 기관들의 반발도 커져가고 있다. 재정부는 현재 복권기금의 30%인 법정배분액을 매년 3분의 1씩 줄여 3∼5년 내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과거 10개 기관에 분리돼 있던 복권사업을 재정부 복권위원회로 통합하면서 기존 발행기관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복권 수익금을 배분해줬다. 그런데 각 기관들이 공익에 사용해야 할 수익금 배분액을 일반 사업에 쓰고 있는 등 문제가 있어 이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재정부의 생각이다.
하지만 제주도와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각 기관들로서는 당장 그만큼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깎이는 것인 만큼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일 법정배분액을 35%로 늘리는 복권법 개정안마저 입법예고되면서 재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심지어 내년 한국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구성에서도 재정부가 사실상 배제됐다.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책 공조 등 세계경제를 G20 정상회의에서 주도해왔다는 점에서 재정부는 배제 소식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재정부 관계자는 “재정부의 주요 정책들에 대해 예전보다 강한 견제가 들어오고 있다”면서 “과거처럼 부총리가 맡지 않는 한 이러한 견제를 이겨내기 힘들 수 있다”고 토로했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