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 최근 문화·장학·향토사업에 거액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
롯데는 장학사업과 복지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롯데재단(이사장 노신영)과 별도로 사회복지법인 ‘롯데삼동복지재단’(삼동재단)을 세워 사회공헌사업에 뛰어들 계획이다. 신격호 회장은 현금 400억 원에 주식 170억 원을 더한 570억 원 규모의 사재를 털어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신 회장의 5촌 조카인 신동인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대행도 돈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시에 설립신청서를 낸 이유는 신 회장의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에 재단 소재지를 두기 위해서다. 신 회장이 1983년 자신의 돈 5억 원을 출연해 세운 롯데재단의 소재지도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으로 되어 있다. 울산시 관계자는 지난 19일 “현재 설립신청서 심사를 진행 중이며 다음 주 정도가 되면 허가가 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번에 설립되는 재단은 향후 소외계층 지원을 비롯해 지역주민 복지사업, 장학사업, 사회복지시설 지원 등 울산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다양한 공익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근래 들어 롯데의 ‘기부천사’ 행보는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롯데는 1000억 원 규모의 오페라하우스를 부산시 북항 재개발지역 매립지 인공섬에 지어 시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근에는 70억 원 규모의 롯데 소유 크리스탈호텔 부지를 마산시의 의료원 건립을 위해 선뜻 내놓기도 했다.
신격호 회장의 ‘변신’과 관련해 재계 관계자들은 롯데가 이미지 쇄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전부터 롯데는 장학사업 등을 벌이고 있었지만 다른 대기업들과 비교해서는 활동이 미미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게 사실. 특히 롯데가 부산을 연고지라고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보여온 지역사회 기여 활동은 빈약했다.
신 회장의 막내동생 신준호 푸르밀 회장이 부산 지역 대표기업인 대선주조를 사고파는 과정에 ‘먹튀’ 의혹이 제기되자 부산 민심은 계속 악화됐다. 재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위기감이 신 회장을 기부천사로 변신시킨 배경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신의 고향인 울산과 부산, 마산을 중심으로 잃었던 민심을 되찾기 위해 신 회장이 직접 지역사회 기여 활동을 챙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신 회장의 기부 행보에는 또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것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특히 신 회장이 사재를 털어 설립하는 삼동재단이 롯데의 후계구도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은 흥미롭다. 롯데는 삼동재단 이사장에 신 회장의 장녀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을 임명했다. 이를 두고 신동빈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주기 위한 후계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신동빈 부회장(왼쪽)과 신영자 사장 | ||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최근엔 정기인사를 앞두고 신 부회장 측근들과 신 사장 측근들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그룹 내에서 남매간 싸움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이자 신격호 회장이 삼동재단 설립을 통해 딸을 분가시키려는 액션을 취하며 직접 교통정리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신영자 사장에게는 삼동재단을 물려줘 딸의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재단 이사 7명과 감사 2명 중 신영자 사장 측근 인사가 포함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롯데 관계자는 “이사에 신장열 울주군수가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 인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삼성·현대 등의 국내 재벌들이 대부분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관례를 보여 롯데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딸에게는 분가 형식으로 재산을 나눠주고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잡음을 제거 하는 것도 ‘관례’. 삼동재단이 신 사장 분가의 주춧돌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현재도 홀수 달엔 한국에 머물며 회사 일을 직접 챙기는 신격호 회장이지만 87세 고령으로 조만간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특히 예전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만한 일에 되레 격려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신 부회장의 해외 진출 1호점인 러시아 모스크바 지점(롯데백화점)이 계속된 적자로 속을 썩이고 있는 와중에도 신 회장이 계속 도전해보라고 아들의 손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그룹 안팎에서는 이러한 신 회장의 발언을 신 부회장에게 그룹 경영을 믿고 맡기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롯데의 경영권 승계가 임박했다고 보는 시선이 늘어나는 이유다. 하지만 롯데 관계자는 “신격호 회장이 여전히 활발히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룹 내 위상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며 “재단 설립은 울산·경남 지역 복지를 위해 순수한 의미로 세운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경영권 승계나 분가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