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왼쪽)와 현정은 회장. 범 현대가 대주주들이 ‘현대그룹 재건’의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한때 이들과 경영권 갈등을 빚었던 현정은 회장의 입장이 주목된다. | ||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옛 현대정유) 등 옛 현대 계열 회사들을 차례로 인수할 태세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종합상사 채권단은 지난 11월 25일, 2350억 원으로 매매가격을 합의한 상태. 현대종합상사는 선박과 플랜트 무역 등을 담당하면서 과거 현대그룹의 수출창구 역할을 했던 기업이다. 그러나 지난 2003년 경영악화를 맞으면서 그룹에서 계열분리돼 채권단 관리를 받아왔다.
현대오일뱅크의 경우 지분 70%를 보유한 아부다비국영석유투자회사(IPIC)와의 국제중재에서 현대중공업이 최근 승소해 경영권을 되찾아올 호기를 맞았다. 지난해 IPIC 측이 현대오일뱅크 지분 매각을 결정하고 인수 희망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자 현대중공업이 현대오일뱅크 지분 매각시 IPIC 측과 맺은 우선매수청구권 조항을 근거로 법적분쟁 중재를 신청했던 바 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국제중재재판소로부터 IPIC 보유 지분 70%를 시장가격의 75%에 넘겨받을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아 경영권 회수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옛 현대그룹이 극동정유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로 현대중공업 등 범 현대 계열사들이 지분 전량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외환위기 여파로 1999년 IPIC 측에 지분 50%가 넘어갔다. 이후 IPIC는 콜옵션(특정 자산을 만기일 이전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 행사 등을 통해 지분율을 70%까지 올렸다. IPIC가 보유하지 않은 현대오일뱅크 지분 약 30%는 현대중공업(19.8%)을 비롯, 현대자동차(4.35%) 현대제철(2.21%) 현대산업개발(1.35%) 등 범 현대가 회사들이 나눠 갖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옛 현대 계열 회사들 인수 작업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정몽준 대표의 사촌동생 정몽혁 전 현대정유 사장이다. 정몽혁 전 사장이 범 현대가 인사들을 찾아가 현대종합상사 인수 요청을 해 인수전 참여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 까닭에서다.
정 전 사장은 ‘왕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가장 사랑했던 동생 고 정신영 씨의 아들로 32세 때부터 현대정유를 맡았지만 경영악화로 인해 외환위기 때 물러났다. 정 전 사장은 지난 2005년 ‘정몽구 회장이 챙겨준다’는 평가 속에 현대차 계열 부품회사 메티아의 대표이사직을 꿰차면서 범 현대가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오일뱅크 인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 전 사장이 예전에 몸담았던 현대오일뱅크로의 복귀 가능성도 점쳐진다. 최근 정 전 사장이 지난 3년간 재직해온 메티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앞으로 현대종합상사나 현대오일뱅크 경영 전면에 나설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의 자금 유동성이 향후 옛 현대 계열사 M&A 과정에 변수가 될 것이란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하는 데 2조 8000억 원 이상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글로벌 경기침체로 인한 선박 수주의 어려움 등으로 현대중공업의 자금 동원능력이 지난해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지난 11월 18일 키움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현대중공업의) 현대오일뱅크 지분 인수자금을 위한 대규모 차입이 주가에 부정적일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IPIC가 국제중재 결과에 반발해 현대중공업으로의 지분 양도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는 점 또한 향후 IPIC와의 법정분쟁 등 난관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한편 일각에선 현대중공업이 인수 자금 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현재 보유 중인 현대상선 지분 처분을 고려할 수 있다는 관측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현재 현대상선의 최대주주는 현정은 회장 계열의 현대엘리베이터(지분율 19.30%)이며 그 뒤를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인 현대중공업(15.30%) 현대삼호중공업(6.84%) 등이 따르고 있다. 현대건설 역시 현대상선 지분을 7.22% 갖고 있어 그동안 정몽준-현정은 두 사람 간의 현대상선 지분 신경전이 현대건설 인수전 변수가 될 것으로 관측돼 왔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 인수를 앞두게 되면서 현대건설 인수 가능성이 후순위로 밀렸다는 이야기가 고개를 들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현대종합상사 현대오일뱅크의 안정적 인수·운영을 위해 현대상선 지분을 처분하면서 현대건설 인수를 포기할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현대그룹 모태 격인 현대건설이 이른바 ‘현씨 현대’에 넘어가는 것을 정몽준 대표를 위시한 정씨 일가가 그냥 두고 볼지도 의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정몽혁 전 사장 외에 정몽준 대표의 작은아버지인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와 컨소시엄을 이뤄 현대종합상사 인수전을 치렀다. 과거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지분 갈등을 벌인 정몽준-정상영 조합이 다시 한 번 한배를 탄 것이다. 일각에선 정몽혁 전 사장까지 포함된 이번 ‘범 현대가 연대’를 계기로 향후 현정은 회장과의 신경전에서 정몽준 대표나 정상영 명예회장이 정몽혁 전 사장을 전면에 대신 내세울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현대중공업의 자금 상황이 변수가 되겠지만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를 품에 안을 현대중공업이 ‘현대왕국 재건’ 기치를 내걸고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들 가능성은 여전하다. 이 경우 현정은 회장 측과 명분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 과정에서 정몽혁 전 사장이 다시 한 번 전면에 나서게 될 가능성과 더불어, 이것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현대건설 인수전이 본격화하면 현대가 장자인 정몽구 회장 의중에도 많은 시선이 향할 것이다. 정주영-정몽구 부자의 내리사랑을 받고 있는 정몽혁 전 사장이 정몽준 대표와 옛 현대 계열사 인수·경영권 복귀를 전제로 강력한 유대를 맺어왔다면 그 뒷배엔 정몽구 회장이 있었을 것이라 보는 시선도 제법 많다. 다수의 재계 관계자들은 현대중공업의 현대종합상사·현대오일뱅크 인수 추진 여파가 범 현대가 내 역학구도에 작지 않은 회오리를 몰고 올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