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취업포털 조사 결과 응답자의 33%가 ‘미래가 불투명할 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답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직장인이면 누구나 한번쯤 이 문구를 떠올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책상 속 깊은 곳에 고이 숨겨놓고 때만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가족만 아니면, 쥐꼬리만 한 월급만 아니면…, 비장의 ‘흰 봉투’를 상사의 책상에 던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맘속에서 사직서를 떠올리는 이유는 세대마다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하다. 요즘 20~30대 젊은 직장인들은 어떨까.
매일같이 이어지는 업무 스트레스의 강도가 계속 심해지기만 하면 견디는 사람도 한계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은행원 K 씨(34)는 취업상담을 청하는 후배들에게 “높은 연봉만 보고 핑크빛 꿈을 꾸지 말라”고 얘기한다. 흔히 생각하는 은행 업무 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상당히 많다고.
“저도 처음에는 솔직히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요. 점점 지쳐가고, 또 높은 연봉만큼 업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정신적ㆍ육체적으로 힘들어요. 매일 퇴근시간이 늦는 건 그렇다 쳐도 실적 압박이 장난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자살했다는 선배 얘길 들으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금융 상품 나오면 후배들 먹을 것 사줘가면서 살살 달래 가입시키는 것도 한두 번이죠. 스트레스가 최고조일 땐 딱 그만두고 싶습니다.”
같은 금융권인 증권사에 근무하는 L 씨(33)도 비슷한 입장이다. 은행 업무보다는 커리어를 쌓는 측면에서 좀 더 도전적이긴 하지만 영업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연봉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기본급 외에 실적으로 따라오는 부분이 많아서 경기가 안 좋거나 증권시장이 침체기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펀드 실적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연락해야지, 기업 분석 해야지, 자기 계발도 해야지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는데 그렇다고 퇴근시간이 이른 것도 아니죠. 스트레스가 많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예상 못했어요.”
대기업 인사팀에 근무하는 H 씨(32)도 업무 강도 때문에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
“인사팀 업무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대기업 다닌다고 부러워하는 친구들이나 주변 시선 때문에 이렇다 할 속내를 털어놓지는 못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갈 순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매일매일 밤 9시~10시 퇴근에 남들 다 들뜨는 금요일에도 월요일 임원회의 준비로 야근은 필수고, 출근 때도 남들보다 한두 시간 빨리 나와야 합니다.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든 데다 업무 외의 개인적인 시간이 나지 않아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고충이 있고 중소기업 직원은 또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배송 관련 회사에서 사무직을 맡고 있는 J 씨(여·27)는 요즘 점점 지쳐가고 있다.
“주로 하는 일이 전화업무예요. 기본적인 경리 업무 외에는 하루 종일 전화 받다가 끝나요.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한다고 남들보다 먼저 퇴근하는 것도 아니죠. 회사가 멀어서 집은 잠만 자는 곳이 돼버렸어요. 경리 업무 쪽으로 경력이 쌓이는 것도 아니고, 종일 짜증 섞인 고객들 전화만 받다보니 도대체 내 미래가 있기나 한 건지 답답해서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딱히 대안이 없어서 꾹 참고 있어요.”
J 씨는 끙끙 앓다가 주변에 상담도 해봤지만 결론은 ‘그냥 꾹 참고 다니라’는 것. 그는 “처음에는 월급 제때 나오는 게 어딘가 하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미래도 불투명하고 내 생활도 없고 회사 다니는 낙을 찾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지방의 한 프랜차이즈 업체에 취업한 M 씨(29)도 사직서를 써놓고 고민하고 있다. 비전 없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하고 노는 것보다는 일단 취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입사를) 결정했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걸 그랬어요. 경영을 전공해서 마케팅 쪽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는데 현재 회사는 전문 마케터가 필요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아요. 처음에는 작은 업체에서 능력도 키우고 같이 커나가자는 생각으로 입사했는데 회사 자체가 안전성에만 무게를 두지 제품 개발이나 확장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그저 매장 수 늘리기에만 급급하죠.”
M 씨는 회사 그만둘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다. 회사에 발붙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다. 연봉이나 경력, 비전, 업무 분위기 어느 것 하나 끌리는 요소가 없다고. 그는 “남는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고 싶어도 지방이라 변변한 학원 하나 없다”며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그만둘 것”이라고 털어놨다.
윗사람과의 불화는 만고불변의 사직 사유 중 하나다. 작은 인터넷 매체에 근무하다 결국 사직서를 던진 N 씨(28)의 이야기다.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꿈을 안고 들어갔는데 사장 마인드가 ‘아니올시다’였어요. 걸핏하면 기획이 부실하다고 핀잔을 주고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죠.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은 기자직 자체에 대한 무시였어요. 그게 뭐 대단한 건 줄 아냐면서 면전에 대고 소리치는 건 예사였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B 씨(30)도 비슷한 마음이다.
“팀장이 휴가 간 사이에 작업을 좀 더 트렌드에 맞고 세련되게 손을 봤어요. 주위 동료들은 물론이고 다른 팀 상사들도 너무 좋다고 인정했죠. 그런데 팀장이 돌아오더니 여건상 안 된다면서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거예요. 아무리 참신한 기획을 내도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누가 봐도 더 나을 것 같아서 이런 저런 기획과 의견을 내도 먹히지를 않으니 허탈할 뿐이죠. 이렇게 무시당하느니 그만두고 작은 의견도 귀 기울여 주는 회사에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조사결과도 이러한 직장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33.7%가 ‘회사 내에서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느낄 때’ 그만두고 싶다고 답했고, ‘나의 능력이 무시당할 때’ ‘월급이 적을 때’ 등의 의견도 상당했다.
하지만 마음뿐 결행은 쉽지 않다. 수많은 직딩들은 오늘도 만원 지하철에 오른다. ‘참을 인’을 세 번씩 되뇌면서.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