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그룹의 ‘정의선 부회장 체제 전환 가속화’의 분수령은 조만간 단행될 그룹 정기임원인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4월 실적부진 논란 속에 사장 직함만 유지한 채 기아차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 포르테 로체 쏘울 등 기아차 상품이 줄이어 히트를 치면서 입지도 되살아났다.
정 부회장은 이후 기아차 대표이사 복귀설이 점쳐졌으나 정몽구 회장은 지난 8월 현대차 부회장 승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재계에선 다음 수순으로 정 부회장의 현대차 대표이사직 입성을 점치는 분위기다. 정기임원인사를 통한 일부 노신급 인사의 2선 후퇴를 발판 삼아 정 부회장이 현대차 경영 선봉장 역할을 공식적으로 꿰찰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정 부회장은 현대차뿐만 아니라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그룹을 대표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는 듯하다.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순방길 경제인수행단에 그룹 대표 자격으로 동행한 데 이어 지난 9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와 현대차 체코공장 준공식, 그리고 지난 1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최고경영자 회담)’에 참석했다. 지난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쇼욤 라슬로 헝가리 대통령 환영 국빈만찬 자리에도 정 부회장이 그룹 간판 자격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외 활동 폭을 넓히는 것 못지않게 경영역량 과시 또한 경영권 승계 명분 쌓기에 더없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 부회장이 M&A(인수·합병) 시장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최근 들어 자주 들려온다. 항간에는 현대차가 자동차 관련 첨단기술을 지닌 옛 현대 계열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첨단 자동차 개발에 보탬이 되는 것과 동시에 옛 현대 계열이란 상징성이 있는 회사를 정 부회장이 나서 인수에 성공하는 것만큼 승계명분 쌓기에 좋은 일도 없다는 관점에서다.
이렇듯 현대차는 정의선 체제로의 전환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지만 정작 정 부회장에겐 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한 주요 계열사 지분율이 부족하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그룹 지배구조에 근간이 되는 계열사들 중에서 정 부회장 명의의 주식은 기아차 주식뿐으로 지분율도 1.87%에 그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정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가 경영권 승계용 실탄창고가 될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룹 물량 지원으로 글로비스가 성장해서 정 부회장 보유 주식 가치가 오르면 훗날 이 지분을 팔아 핵심 계열사 지분 매입용으로 활용할 것으로 점쳐진 것이다.
시민단체로부터 “그룹 계열사들의 부당지원을 받는다”는 비판을 받아온 글로비스는 최근 들어 새로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1일 ‘현대차와 2010년 1월 1일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2년간 완성차 해상운송계약을 3559억 원에 체결했다’는 글로비스 공시 내용이 논란의 발단이 됐다. 원래 현대차의 해상수출물량 운송은 ‘유코카캐리어스’라는 업체가 전담해왔다.
이 회사는 노르웨이 해운업체인 빌헬름센이 지분 80%, 현대차가 12%, 기아차가 8%를 각각 보유한 업체다. 유코카캐리어스는 현대차가 현대상선과 맺었던 장기해상운송계약을 지난 2002년 12월 1조 5000억 원에 인수했다. 공시에 따르면 이 회사는 올해 12월 31일까지 현대차 물량 해상 운송을 전담하며 이후 2019년까지 단계적으로 물량을 축소하기로 계약돼 있다. 2010년에는 현대차 물량의 75%, 2011년엔 70%를 맡기로 돼 있는데 나머지 물량을 글로비스가 따낸 것이다.
글로비스는 정의선 부회장이 지분 31.88%, 정몽구 회장이 24.36%를 보유한 회사다. 유코카캐리어스 최대주주인 빌헬름센은 글로비스 지분 20%를 보유, 현대차와 돈독한 관계에 있다.
이번 해상물류수송 계약에 대해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논평을 통해 “정몽구 회장 일가가 전체 지분의 56%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글로비스가 그룹 내 물류 수송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회사기회 유용’(회사의 이익으로 잡혀야 할 사업기회가 대주주 등 개인에게 돌아가게끔 만드는 것)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라 꼬집었다.
정 부회장은 현재 비상장 계열사 현대엠코와 위스코 등의 최대주주에 올라있는데 이 회사들 역시 그룹 물량에 의존해 성장 중인 회사들이다. 만약 이 회사들을 상장시켜 지분을 팔아 주요 계열사 지분 매입에 활용하려 들 경우 또다시 회사기회 유용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셈이다.
지난 1999년 현대차 입사 이후 10년 만에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정의선 부회장이나 이런 아들을 지켜보는 정몽구 회장 머릿속에서 지분 승계 고민이 쉽사리 사라지진 않을 전망이다.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하는 새로운 지배구조를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진 정몽구 회장이 아들의 안정적 승계를 위한 어떤 묘수를 짜낼지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