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여배우들>의 한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음반기획사에서 일하는 Y 씨(여·32)는 아찔한 기억이 있다. 2년 전 직장 송년회 모임에서 술을 먹고 ‘오버’를 하다가 깁스까지 한 것.
“원래 어디를 가든 얌전떨고 있지 않아요. 남들보다 술도 센 편이어서 늘 끝까지 남곤 했죠. 그때는 12월 초라 모임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쌩쌩했어요. 근데 그날따라 술을 주는 사람도 많고 사양 않는 성격이니 다 받아먹게 됐어요. 철인도 아니고 아무리 술이 세도 취하지 않을 수가 없죠. 기분이 한껏 ‘업’돼서 ‘오버’가 시작됐어요. 집에 가겠단 사람들 다 붙잡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떠들었는데 절정은 노래방이었어요. 치마를 입은 날이었는데 제대로 놀아보겠다고 테이블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서 발을 헛디뎌 발목을 다친 거죠.”
Y 씨는 심하게 발을 접질렸고 바로 119에 실려 갔다. Y 씨는 “뒤이은 모든 모임들을 취소해 그날이 그해 마지막 모임이 됐다”며 “놀기 좋아하다 크게 한 번 당한 셈”이라며 웃었다.
Y 씨처럼 웃고 넘어갈 일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P 씨(여·27)는 술 때문에 얼굴 들지 못할 실수를 했다.
“기억 안 나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동료들의 증언으로 속속 드러나는 진실을 듣고 있으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예요. 사건을 재구성해 보면 3차 술자리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하네요. 2차부터 조짐이 보여서 주변 여자 동료를 붙잡고 과한 애정표현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했다가 애꿎은 다른 남자 동료 앞에서는 ‘나 나쁜 사람 아니’라며 통곡을 했대요. 그러다 꼼장어집에 갔는데 갑자기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날꼼장어를 그대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은 거예요. 반 정도 먹고서야 동료들이 억지로 빼내서 겨우 뱉었다는데 생각할수록 미칠 노릇이죠.”
P 씨는 “그동안 별 일 없이 무난한 회사생활을 해왔는데 창피해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고 털어놨다.
직장 송년 모임이라면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상사의 ‘너그러움’이다. 술자리를 빌미삼아 벌어지는 나긋나긋한 분위기에 취했다간 후폭풍에 시달려야 한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L 씨(여·28)는 직장생활 1년차 때 큰 교훈을 얻었다. 순진했던 그때 송년모임에서 뼈아픈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입사한 지 채 1년이 안 됐을 때고 여직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선배를 비롯해서 상사까지 거의 저한테 호의적인 분위기였어요. 막내여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특권도 누릴 수 있었죠. 하지만 그 해 송년회가 이 특권에 종말을 고했죠. 술자리가 무르익고 기분이 좋아진 팀장이 앞으로 더 잘해보자며 불만이 있거나 제안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고 하셨죠. 아마 멀쩡한 정신이었으면 절대 안 그랬을 것 같은데 그날은 입만 열면 폭탄이 터졌어요. 팀장 외모 흉보기부터 시작해서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직접 타 마셔라, 담배 피운 다음에는 제발 부르지 마라, 단순 업무 하려고 입사한 거 아닌데 회사일이 재미없다는 둥 한참을 지껄였어요. 다음날 정신을 차렸을 땐 아차 싶었죠.”
L 씨는 이후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차라리 단순한 업무가 좋을 정도로 골치 아프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자료 분석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일을 빨리 배우기는 했지만 사실 일보다 다정했던 상사의 싸늘한 얼굴을 보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고 전했다.
여자들끼리 송년모임을 하면 행동도 대담해진다. K 씨(여·26)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대학 시절 친했던 동기들과 의미 있는 모임을 갖고 싶었어요. 그냥 사람 많고 북적거리는 술집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긴 싫었죠. 그래서 옛 추억도 되새길 겸 학교에서 모이기로 했어요. 방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촛불을 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죠. 그런데 맥주를 마시다 보니까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어요. 몇 번을 갔다 왔는데 취기가 돌수록 다들 귀찮아졌죠. 지대가 높았고 가까이 있는 건물 문이 잠겨 꽤 멀리 돌아가야 화장실이 있었거든요. 날도 어두워지고 결국 잔디밭 구석에서 다 같이 일을 봤는데 순찰 돌던 학생회 자치방범대에 딱 걸렸어요.”
술로 인한 동료와의 실수도 회사생활에 악영향을 미친다. 외국계기업에 근무하는 J 씨(여·30)의 이야기다.
“송년회 때 평소 같지 않게 술을 더 많이 마셨어요. 연말이라 들떠서 더 그랬는데 안 그러다가 그날따라 계속 술을 마시자고 고집을 부린 거예요. 다들 갈 때가 됐는데도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아서 같은 방향이던 동료가 절 떠맡게 됐는데 그 뒤로 필름이 끊겼죠. 다음날 일어나보니 동료의 원룸이었죠. 외간남자의 침대에서 벗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억을 지우고 싶더라고요. 동료가 깨기 전에 몰래 빠져나왔는데 그 주말 내내 월요일 출근해서 어떻게 얼굴을 볼까 고민이었죠. 전 당시 사귀는 사람이 있었던 데다 그 동료랑은 전혀 만날 생각도 없었거든요.”
J 씨는 예상대로 출근 후 ‘한방을 쓴’ 남자 동료의 애틋한 눈빛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메신저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며 얼렁뚱땅 마무리 지었다. 그는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한 것 같아 동료에게도 미안했고 스스로도 너무 후회가 됐다”며 “지금은 다른 부서라 살 만하지만 그때는 하루하루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연말이면 종류도 다양한 모임들로 술 마실 기회가 많다. 그런 자리를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좋지만 100% 긴장을 늦추는 것은 금물이다. 직장생활 15년차로 수많은 실수들을 목격한 M 씨(45)는 젊은 후배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다. 상사가 술자리에서 나온 자신의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사회 초년병들이 많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야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기관리에 허술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고. 그는 “실수를 해도 용납이 될 것 같은 친한 친구들 앞에서 해야 한다”며 “아무리 평소 이미지가 좋아도 단 한번의 실수로 ‘낙인’이 찍힐 수 있다”고 충고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