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구 전 회장(왼쪽)과 박삼구 명예회장 | ||
일각에서는 이번 구조조정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회사가 아니라 금호석화나 대한통운 등 주축이 되는 회사를 내놓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룹이 해체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이전부터 나돌았다.
비록 자율적인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해 채권단에 의한 구조조정의 형식을 띠게 됐지만, 박삼구 명예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에서 보면 손해 볼 게 없다는 관측도 있다. 박 명예회장 측으로선 서운하겠지만, 재계의 한 관계자는 “부실기업 털어내고, 해체 위기 극복하고, 경영권을 지켰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평가할 정도다.
재계 8위까지 치고 올라갔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그룹’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하루아침에 추락한 까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 데 있다. 대우건설 인수 당시 약속했던 풋백옵션이 유동성 문제에서 내내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계에 떠들썩했던 금호의 유동성 위기설은 사실로 드러났고, 결국 금호그룹은 대우건설을 인수한 지 3년 만에 다시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쪼그라든 금호를 바라보는 박삼구 명예회장과 박찬구 전 회장의 느낌은 사뭇 다를 듯하다. 아직 구체적인 얘기가 오가는 건 아니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벌써 박찬구 전 회장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7월 ‘형제 동반 퇴진’ 이후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던 박 전 회장이 새삼 주목받는 까닭은 이번 구조조정안 발표로 박삼구 명예회장의 부실경영이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형제 동반 퇴진은 유동성 위기설로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있던 그룹의 이미지를 더욱 훼손시킨 사건이었다. 지난 25년간 금호그룹은 ‘형제경영’을 앞세우며 돈독한 우애를 과시해왔다. 두산그룹이 형제간 진흙탕 싸움을 벌일 때도 “우리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던 금호그룹의 장담이 무색해진 그 사건으로 금호그룹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그룹의 위기가 직면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박삼구 명예회장은 당시 박찬구 전 회장을 해임한 이유로 “대주주 4가계의 그룹 공동경영합의 위반”을 들었다. 박찬구 전 회장 측이 금호석유화학의 지분을 늘려 그룹 이미지를 훼손하고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순조롭게 이행하는 데 지장을 초래했다는 것이 구체적인 이유였다.
당시야 어쨌든, 지금 와서 보면 박찬구 전 회장의 금호석유화학의 지분 매입은 앞날을 내다본 셈이 됐다. 만일 대우건설·대한통운 등 무리한 M&A(인수·합병)를 추진해 유동성 위기를 초래한 박 명예회장의 경영 방식을 반대한 박찬구 전 회장이 어떤 식으로든 석유화학부문 분리에 성공했다면, 박찬구 전 회장은 지금 미소 짓고 박삼구 명예회장의 처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박찬구 전 회장이 꽃놀이패를 들고 있다”는 말이 오가기도 한다. 형제 동반 퇴진 이후 박찬구 전 회장은 이따금 법적 대응을 시사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왔다. 이번을 기회로 박 전 회장이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금호석유화학 지분 18.47%를 보유하고 있는 박찬구 전 회장이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에 동참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주식 출연 문제가 박찬구 전 회장 등 다른 형제들과 합의한 것이냐’는 질문에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사장은 “협의하고 있다. 통제할 수 있는 선까지 하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박 전 회장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함을 내비쳤다.
하지만 채권단과 금호그룹 측이 최대 5년간 현재 대주주의 경영권 유지를 약속함에 따라 당장 박찬구 전 회장이 그리 크게 부각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전 회장이 앞으로 자주 언급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예측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지난 7월의 해임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고, 거의 ‘축출’이나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안 발표 직후 “새로 창업하는 심정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진 박삼구 명예회장은 지난 12월 31일 임원회의에서 “겸허한 자세로 위기를 극복하자”며 임직원들을 독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다 할 언급이 없는 박찬구 전 회장이 향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박찬법 현 회장의 역할과 입지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지난 7월 ‘금호의 손길승’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그룹 회장직에 오른 박찬법 회장은 그룹 구조조정과 관련해 지금까지 큰 성과를 거둔 것이 많지 않다. 물론 당초 금호그룹 측은 “신임 박찬법 회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재무구조개선 등 그룹 구조조정작업은 박삼구 명예회장이 맡는다”고 밝힌 바 있다.
박찬법 회장은 그동안 베트남 현지를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는가 하면, 헌혈릴레이 연말이웃돕기성금 등 그룹의 동요를 막고 분위기를 이끄는 역할에 주력해왔다. 박 회장은 앞으로도 특유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그룹과 임직원들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금호아시아나그룹에게 2009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해일 것이다. 세밑 막바지에 악재를 일단락지은 ‘금호호’가 2010년 새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재계는 물론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아울러 박삼구 명예회장과 박찬구 전 회장 형제의 움직임은 일 년 내내 세간의 시선을 사로잡을 듯하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