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취업·인사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130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6%가 ‘직장에서 복수를 꿈꿔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크건 작건 한 번쯤 통쾌한 복수전을 기다리는 셈이다. 이렇게 거창한 복수까지 다짐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무시’다.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하는 I 씨(여·27)는 늦게 부임한 여자 상사한테 소심한 복수전을 펼쳤다.
“지난해 초에 대학원을 졸업한 세 살 많은 상사가 과장으로 들어왔어요. 전문대를 졸업한 제가 학벌은 좀 딸려도 연차는 훨씬 많거든요. 그런데도 은근 무시하는 듯한 말투와 태도로 살살 사람 신경을 긁는 거예요. 대놓고 반항할 수도 없는 데다 그런 강심장도 아니어서 스트레스만 늘고 있었는데 이런 심정을 자주 가는 동호회에 하소연했더니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죠. 바로 실행했어요. 보통 여자 화장실에 칫솔들을 한꺼번에 두는 편인데 과장 칫솔을 꺼내서 세면대를 문질렀어요. 추천해준 변기 닦기는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생일 같은 행사는 일부러 혼자만 안 챙겨줬고, 화이트데이나 밸런타인데이 이런 것도 혼자만 쏙 빼놨죠. 그 과장은 신경도 안 쓸 수 있지만 일단 저는 속이 좀 풀리던데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Y 씨(여·26)도 자잘한 복수로 속을 달랬다.
“가까이 가기도 싫은 부장이 하나 있는데 잔심부름을 자꾸 시켜요. 부르면 일부러 못 들은 척도 해봤는데 뚝심은 있어서 대답할 때까지 끝까지 부르죠. 툭하면 커피 타령에 거래처 전화도 꼭 저보고 걸어서 바꿔 달래요. 4시쯤 되면 간식 좀 사오라고 부르고, 심지어 약 먹겠다고 물 좀 떠달라고도 하는 거예요. 나이도 한참 많고 부장급이라 반발은 못하고 몰래몰래 혼자 풀고 있어요. 회식 가면 무조건 구두는 한 짝씩 멀리 떨어뜨린 다음 다른 사람 신발 사이에 막 섞어놔요. 자리에 없을 때 모니터에 붙은 중요한 메모지는 슬쩍 없애버리고요. 커피 타는 탕비실이 사무실에서는 안 보이거든요. 무조건 화장실 세면대 물 받아 탑니다.”
이 정도 복수는 차라리 귀엽다. 프로그래밍 관련 업종의 K 씨(29)는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면 좀 더 치명적인 복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데다 수시로 핀잔을 주던 상사가 있었어요. 내 언젠가 크게 한 방 터트리고 간다고 속으로 이를 갈았죠. 그러다 이직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냥 곱게 나갈 수 있나요? 그 상사 컴퓨터에 살짝 바이러스 좀 입양시켰죠. 좁은 업계 분위기 때문에 포맷까지는 못했어요. 아예 다른 분야로 옮기는 거였으면 화끈하게 실행하는 건데 아쉽죠. 바이러스야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 턱이 있나요. 마지막으로 PC방에 가서 대출사이트랑 성인사이트 게시판에 상사 휴대폰 번호랑 이메일 남겼습니다. 추적이 불가능하고 익명이 가능한 많은 공개 사이트에 정보 제공을 하고 왔는데 아마 한동안 고생하겠죠.”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사내연애도 복수극의 발단이 된다. 직장 내에서 사귀고 곱게 결혼까지 골인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 만약 귀책사유가 한 사람에게 있을 때는 볼 때마다 당한 사람의 눈에는 불꽃이 인다. 음료회사에 다니는 N 씨(여·28)는 ‘입소문 마케팅’을 활용했다.
“올가을 결혼까지 생각하던 직장 선배가 있었어요. 2년 정도 사귀었는데 얼마 전 바람피우다 걸린 거예요. 성질 죽여가면서 정말 잘해줬는데 분하더라고요. 일단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무시로 일관했는데 그것만으로 안 풀려서 다른 방법을 썼죠. 부서에서 가장 입이 싼 여자 선배와 밥을 먹으면서 슬쩍 이야기를 흘렸어요.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곱게 포장하고 살 붙여서요. 그 다음엔 일사천리죠. 나름 젠틀맨인 척하면서 이미지 관리하던 사람인데 아마 앞으로 여직원들의 눈총 좀 받겠죠. 마음 같아선 사내 인트라 게시판을 통해 만천하에 알리고 싶지만 제 무덤 파는 격이라 그건 겨우 참았어요.”
비슷한 일을 겪은 J 씨(여·30)는 좀 더 ‘쿨하게’ 복수했다. 연애사건의 경우 티 나는 복수는 오히려 본인을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한눈팔면 바로 안녕, 하는 거죠. 구차하게 매달리면서 아쉬운 느낌을 줄 필요가 전혀 없어요. 매달리고 욕하고 그건 상대방에게 오히려 권력을 줄 뿐이죠.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가 있어요. 딱 그 노래가 정답이에요.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사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멋지게 연애하는 거죠. 전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금상첨화겠죠. 제 경우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할 때쯤 입사 동기였던 전 남자친구가 울며불며 매달렸어요. 이거야말로 통쾌한 복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외모에 관한 무심한 발언도 상대방의 가슴에 칼을 품게 만든다. 살 때문에 고민 많은 G 씨(여·29)도 같은 부서 상사에게 이를 갈고 있다.
“IT 관련 회사에 다니는데 여직원이 많은 편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불편함을 느끼거나 그렇진 않았는데 출산하고 복귀했더니 상사가 자꾸 스트레스를 주네요. 안 그래도 아기 낳고 모유수유를 하는데도 생각만큼 살이 빠지지 않아 고민인데 사람들 있는데서 창피를 줘요. ‘그 살 언제 뺄 거냐’고 해서 처음에는 저도 농담처럼 웃어넘겼는데 거의 매일 재미 들린 사람처럼 걸고넘어지니 슬슬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점심 먹으러 가면 맛있는 것 좀 쏘시라, 후식으로 커피 한잔 돌리시면 인기 높아지시겠다 하면서 돈을 쓰게 만들고 있죠. 회식 가도 2차는 무조건 그 상사가 내게끔 분위기 조성하고요. 유치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는 없더라고요.”
계속해서 아이템을 가로채 갔던 선배 때문에 억울한 경험을 당했던 E 씨(31). 그는 가장 좋은 복수가 뭔지 고민했고 자신을 분하게 만든 사람보다 잘나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는 “이후 선배를 밟기 위해 몸을 혹사해가면서 열심히 뛰었다”며 “그러나 10년차 선배의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고 털어놨다. 최고의 현자로 꼽히는 달라이 라마 ‘틱낫한’ 스님도 마음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최고의 화풀이 방법이다”라고. 물론 선택은 자유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