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5월 당시 김중수 경제수석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한 국내외 상황을 보고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 ||
지난 2008년 3월 20일. 청와대 춘추관 기자실을 찾은 당시 경제수석비서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내정자는 이 대통령의 꼼꼼함에 혀를 내둘렀다. 김 내정자는 “이 대통령은 두루뭉술한 것이나 추상적 대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좋아한다”면서 “저희같이 책 보고 앉아서 숫자 보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내정자는 한발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준비를 안 해가면 수석이고 비서관이고 본전도 못 찾는다”면서 “보고하러 들어갔다가 대통령의 꼼꼼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내정자가 이 대통령에게 놀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정부에 합류하기 전까지 이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대통령과 한때 대선 경쟁 상대였던 고건 전 총리와 가까운 사이였다. 김 내정자는 고 전 총리가 대권에 도전할 당시 싱크탱크였던 ‘미래와 경제’ 정책개발원장을 맡아 정책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으로 정권 출범을 앞두고 참모들과 워크숍을 가진 자리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한) 강만수 씨가 나를 잘 아는 것 같아도 잘 모른다”면서 “오히려 (경제수석비서관에 내정된) 김중수 씨는 더 정확히 알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 화제가 됐다. 친분이 없는 김 내정자가 자신을 오히려 객관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의미였다. 그가 이 대통령과 일한 지 불과 두 달도 안 돼 ‘MB맨’이 됐던 것을 보면 이 대통령의 ‘예언’이 적중했던 셈이다.
김 내정자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가 됐다. 오하이오주립대 인적자원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냈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장, 한림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정운찬 국무총리와 함께 ‘경기고가 낳은 3대 천재’로 통하기도 한다. 국제금융을 전공한 학자 출신답게 온화한 얼굴에 말도 조곤조곤 하는 스타일이다.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열흘도 안 된 지난 2008년 3월 5일. 이 대통령이 비서관들이 일하는 청와대 내 비서동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경제수석실에 들러 “일하는데 파티션이 낮아지니 좋죠? 완전히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 내정자는 “낮아지니까 목소리가 작아진다. 조용해진다”며 ‘교수님 같은’ 답변을 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순간 썰렁해지자 “공개적인 것이 불편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이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브리핑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물가를 잡기 위해 쌀과 밀가루 같은 생활필수품 50개 품목의 가격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문답식으로 자세히 ‘강의’해 마감시간에 쫓기는 기자들의 애를 태웠다.
당시 김 내정자는 50개 품목 외에 서민들에게 부담이 큰 부동산 문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럼 전·월세는 어떻게 볼 것이냐. 사시는 분은 잘 알겠지만 올라도 매일 오르진 않고 1년간 조사해 보면 큰 변화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올랐나? 전·월세 가격은 대부분 안 올랐지만 이사하는 사람들은 올랐다고 느꼈을 것이다”며 지나친 친절을 베풀었다.
예상처럼 정권 출범 초기 한참 문제가 됐던 공직자 재산공개에서도 김 내정자는 자유로웠다. 그는 언론에서 아파트 두 채를 보유하고 있다고 비판 받았다. 하지만 아파트를 부인과 공동명의로 등록하면서 서류상에 반반씩 두 번 표기된 것으로 나타나 오히려 김 내정자의 가정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MB노믹스 전도사’로 나섰던 김 내정자는 불과 6개월도 안 돼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에 따른 촛불집회 여파로 물러난다. 제대로 된 정책을 펴지도 못한 채 청와대를 떠나게 된 김 내정자는 무척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에 대한 인적 쇄신 요구가 들끓던 2008년 6월 3일. 제24회 국무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청와대 참모와 내각총사퇴 후 재신임과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난 모르겠다”라며 짧게 대답했으며,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과 박재완 정무수석도 “못 들어봤다”면서 “난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허허허” 웃으며 질문을 피해갔다. 반면 김 내정자는 “비서가 사의 표명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 뒤 “(총리 제청권이 있는) 장관이야 그렇지만…, 대통령께서 판단하는 거지”라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김 내정자는 청와대에서 불과 4개월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학자 티’를 벗고 ‘MB맨’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전언이다. 이 대통령은 정권 출범 전 참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사생활이 없을 것”이라면서 “퇴근하고 나서 술 한잔하고 그런 것이 없을 것이다. 로비 좋아하는 사람은 매우 고민이 될 것”이라고 참모들의 근신과 헌신을 주문했다.
김 내정자는 이 말을 ‘110%’ 실천했다고 한다. 당시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비서관, 행정관보다 일찍 퇴근하거나 늦게 출근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면서 “저녁 약속을 잘 잡지도 않았지만 혹 있더라도 다시 청와대에 들러 잠깐이라도 의자에 앉은 뒤 퇴근하곤 했다”고 전했다.
김 내정자는 한은 총재로 선임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은이 정치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은 맞지만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이를 두고 야권과 금융권 노조에서는 “김 내정자가 대통령에 대한 충성서약을 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반면 김 내정자의 오랜 지인들은 이 같은 비난이 그의 입만 보고 판단한 것이라며 그를 두둔한다. 김 내정자의 소신과 조직 장악력은 놀라울 만큼 강해 곧 마련될 무대에서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 내정자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를 역임할 당시 ‘쉬어가는 곳’에서 ‘결과를 내는 곳’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전언이다.
김 내정 자의 향후 행보는 2년 전, 당시 류우익 대통령실장 주재 정권 출범 첫 직원 조회에서의 다짐을 보면 엿볼 수 있을 듯하다. 김 내정자는 “인선됐을 때 소감에서 밝혔듯이 경제 살리기는 시대적 소명이다. 경제부처 직원들만의 일이 아니고 모든 직원들이 경제 살리기에 동참해야 한다”면서 “이명박 정부에서는 첫 번째가 변화고, 두 번째가 기강엄격, 세 번째가 유능한 정부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정부에서 의도는 좋았는데 왜 실패했느냐. 여러 사례를 설명하지 않겠다”면서 “직원들이 유능한 정부의 구성원이 돼야 한다. 어떻게 해야 결과가 성공할 것인가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용기 파이낸셜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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