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집에 도착해.”
지난 2003년 11월 5일 오후 6시 18분 경기 포천시 소흘읍 한 초등학교 앞에서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엄 아무개 양(당시 15세)이 어머니 이 아무개 씨에게 전화를 걸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대화는 딸과 어머니가 나눈 마지막 말이 됐다. 초등학교에서 집까지는 800m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엄 양은 3시간이 넘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휴대폰은 이 씨와의 통화 직후 전원이 분리돼 꺼져있었다.
지난 2004년 2월 8일 경찰관들이 실종된 여중생 엄 양의 시신이 발견된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배수로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던 중 실종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2003년 12월 22일 엄 양의 휴대폰과 가방, 운동화가 발견됐다. 실종 장소에서 10㎞나 떨어진 경기 의정부시 민락동의 한 도로공사 현장 쓰레기더미에서였다. 당시 경찰들은 “범인이 마치 경찰을 농락하고 자신을 찾아보라는 듯 엄 양의 소지품들을 쓰레기 위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실종 96일 만인 2004년 2월 8일 오전 10시 15분 엄 양은 유류품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2㎞ 떨어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5리의 한 식당 진입로변 배수로 안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엄 양은 교복과 속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로 다리를 가슴 쪽으로 구부려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신은 유기된 지 오래 됐는지 머리부터 가슴까지는 심하게 부패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손톱과 발톱에는 빨간색 매니큐어가 조잡하게 칠해져있었다. 엄 양의 사후에 범인이 칠한 것으로 보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엄 양의 부검을 실시했지만 사체의 부패 정도가 심해 정확한 사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당시 국과수의 한 관계자는 “결박이나 목 졸림 등 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정액에 대해서도 음성반응이 나왔지만 부패가 심해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고 확정짓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고 전했다.
현장에서도 범인의 혈흔이나 머리카락 등 용의자 파악의 단서가 될 만한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목격자나 제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건현장 주변 요도. 연합뉴스
그러나 범인으로 추정되는 용의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은 지난 2003년 6월 엄 양이 사라진 장소 부근에서 여중생 2명을 납치했다 풀어준 적이 있는 박 아무개 씨와 그 일당 2명을 엄 양의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엄 양 살인사건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9년에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강호순의 여죄를 수사 중이었던 경찰이 엄 양 사건과 강호순의 연관성을 조사했지만 결국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경기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범행 수법 차이가 있어 두 사건을 연관 짓기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경찰로서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9년이 지난 현재 엄 양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포천경찰서의 전담팀은 운용되고 있지 않았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들도 다른 경찰서로 전근을 가거나 경찰을 그만둬 포천경찰서의 관계자들은 엄 양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앞서의 포천서 담당형사 김 아무개 경정은 “지금은 내가 엄 양 사건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뭐라 판단내리기 힘들다”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당시에도 범인의 범행 수법이나 행동이 상반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아 용의자를 특정 하기 힘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관용차에 부착됐던 포스터.
또한 엄 양 사후에 손톱과 발톱에 서툴게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행동이나, 엄 양이 입고 있던 교복이나 속옷, 지갑 등이 발견되지 않은 점에 미뤄 범인이 변태성욕자로 판단되지만, 엄 양을 납치하면서 위치추적을 막기 위해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하고, 사체 유기 현장 등에서 자신의 증거를 전혀 남기지 않는 모습을 보면 전문지식을 가진 지능범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앞서의 김 경정은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이 영화 <살인의 추억>을 모방한 범죄였다는 주장에 대해 “배수관에 시신을 유기했다는 점 말고는 범행 수법이 <살인의 추억>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모방범죄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범인이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모방범죄처럼 꾸몄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빨리 잡아야 하는데…뒷머리 당긴다” 중압감 못이기고 음독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의 슬픔은 엄 아무개 양의 가족과 주변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찰에게까지 큰 상처를 남겼다.
엄 양의 시신이 발견되고 수사가 시작된 지 8개월이 지난 2004년 10월 16일 경기 포천시 신북면 한 유원지 내 산중턱에서 포천경찰서 강력1반장 윤 아무개 경사(당시 47세)가 신문지 위에 누운 채 숨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윤 경사는 엄 양이 실종됐던 11월부터 사건을 담당했던 반장이었다. 그의 옆에는 ‘하고 싶은 말도 하고 화날 때는 풀었어야 했는데. 못난 남편 만나 고생이 많았소. 내가 없더라도 아들, 딸을 잘 대해주오. 가족들과 제대로 놀러 가지도 못 해 미안하오’라는 내용의 유서와 독극물 병이 놓여있었다. 윤 경사는 10월 11일 동료에게 “뒷머리가 당겨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경찰서를 나선 뒤 연락이 끊겨 5일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윤 경사의 부인 안 아무개 씨는 경찰 조사에서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빨리 살인범을 잡아야 하는데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미뤄, 경찰은 윤 경사가 여중생 살인사건 수사의 중압감을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봤다.
당시 윤 경사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던 한 후배 경찰은 “윤 경사는 1년 동안 엄 양의 사건에만 매달려 있었다. 엄 양의 사체가 발견된 2월부터는 부근 읍사무소에 마련된 수사본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엄 양이 윤 경사의 딸과 같은 또래여서인지 그는 사건이 미궁에 빠지자 괴로워했다.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전했다.
사건이 미제로 빠진 지 9년, 윤 경사의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 경기 포천시에 살고 있는 윤 경사의 부인 안 씨는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고 한다. 안 씨의 지인은 “안 씨가 아직 남편을 잃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힘들어 한다. 다시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윤 경사와 함께 일했던 김 아무개 경감은 “윤 경사의 자살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많이 났다. 꼭 범인을 잡아서 그의 허망한 죽음을 위로하고 싶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말을 줄였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