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우윳값 인상 파동으로 ‘물가 관치’의 구태가 재연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대인 상황에서 기업들에 제품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공요금은 올리는 판에 서민물가를 고려한다면서 우윳값을 올리지 말라는 것은 모순 아니냐”면서 “기업들 팔을 비틀어 눌렀던 가격이 한 번에 터지면 그야말로 통제불능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 우유업체 관계자도 “정부가 물가상승률 1%의 시대에 과거 고물가시대에서나 횡행했던 찍어 누르기 식 물가관리에 나서는 것을 보면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지나친 우윳값 인상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발은 정부가 고려해야 할 최우선 요인이다. 하지만 이들 뒤에서 물가잡기에 나선 정부의 압박이 과도하게 비쳐지면 빈축을 살 수밖에 없다. 최근 우유업체가 가격을 올리려 하자 기획재정부가 관련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우유의 판매마진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가격을 올리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이를 놓고 논란이 불거지자 재정부는 “통상적인 물가 점검 차원의 간담회였다. 가격 개입을 했다는 것은 오해”라고 해명했다.
사실 우윳값 인상은 과자, 빵, 분유 등 주요 생필품 가격에 큰 인상 압력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원유가격연동제 실시를 빌미로 잇속을 챙기려는 우유업계의 얄팍한 속셈이 있다면 제재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물가관리 방법이 관권을 앞세운 찍어누르기 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금융업계 수장들의 교체와 ‘산업혁신운동 3.0’ 등에 이어 경제관치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도 달라진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관련업체들은 정부가 유업체들을 압박하는 것에 대해, 세제개편을 두고 증세 논란이 확산되는 와중에 ‘서민부담 가중’의 사례로 물가까지 들먹일 경우 최악의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선제적으로 우유업체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또 오는 9월 이후 공공요금을 먼저 올리려는 복안을 세워놓고, 이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기 위해 기업들을 옥죄는 것 아니냐는 ‘공공요금 인상 음모설’도 나오고 있다. 업체들 사이에선 “이명박 정부식 기업 때려잡기라면, 참을 만큼 참았다”며 반발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우유업계는 일단 일보 후퇴의 양상을 보였지만, 다음주쯤 다시 가격 인상을 시도할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업체들이 원유 가격 인상에 따른 손실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하루 억대가 넘는 손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원유 가격이 ℓ당 106원 오르면서 하루 집유량은 약 2000t인 서울우유의 경우 매일 2억 원가량 손실을 보고 있다. 하루 집유량이 900t 전후인 남양유업과 매일유업도 매일 1억 원가량 손실을 떠안고 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늦어도 다음 주는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가억제 논란이 벌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지표물가와 체감물가의 차이다. 지표 물가는 1%지만, 체감 물가는 3% 수준이다. 한국은행이 7월에 발표한 기대 인플레이션은 3%에 육박했다. 지표물가는 낮은데 피부에 와 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물가 수준 자체가 많이 오른 데다, 서민들이 자주 찾는 식품이나 농산물 중심으로 가격이 급등한 결과다. 통계청은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올 연말까지 품목별 가중치를 현실에 맞게 조정할 계획이다.
정부의 물가관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도 집권 내내 ‘물가와 전쟁’을 벌였다. 2008년에는 서민 살림과 밀접한 52개 주요 생활필수품을 집중 관리하겠다면서 ‘MB물가지수’를 만들고 가격 인상 계획을 발표한 기업들을 압박해 인상안을 철회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지난 3월 ‘MB물가지수’는 폐지됐다. 품목 선정에 대한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온 데다 품목 간 지역별 가격 차이가 커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부는 “민간의 시장 감시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유치원비, 보육료, 통신비 등의 실태 조사가 발표된 것은 이런 기조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우윳값 파동에선 오히려 업체들이 ‘원가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원윳값 인상이 이뤄질 경우 제품가격에 반영하기로 한 원가연동제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선 업체들의 요구를 따를 수도, 두고만 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