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수 검찰총장 | ||
당초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SK로부터 1백억원을 제공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확인되면서 제2, 제3의 SK가 존재하지 않겠느냐는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 선대위 총무위원장을 지낸 이상수 의원의 대선자금 규모에 대한 헷갈린 언급은 혼란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기업 후원금이 74억여원에 불과하다며 기업 후원금 내역을 책자로 만들어 공표한 지 채 1백일도 되지 않아 후원금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재계서열 3위 SK가 공식 후원금 외에 현금으로 1백억원을 한나라당에 지원했다면, 다른 대기업들도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의 정치자금을 내놓지 않았겠느냐는 관측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야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은 SK 이외의 대기업으로 수사 범위를 확대키로 했다. “국민이 OK 할 때까지 대선자금 수사를 벌이겠다”는 검찰의 결연한 의지를 밝힌 셈이다.
과연 지난해 대선 당시 기업들로부터 정치권에 유입된 대선자금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검찰은 전체 대선자금의규모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검찰의 SK에 대한 분식회계 수사가 한창이던 올해 초, 정치권 주변에서는 ‘괘씸죄가 작용했다’는 관측이 주를 이루었다. 지난해 대선 당시 ‘SK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1백억원을 베팅했다’는 풍문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검찰 수사결과 밝혀진 SK 비자금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분식회계를 통해 조성한 자금을 계열사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부당하게 사용한 흔적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결국 최태원 회장이 구속됐고, SK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수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울지검 형사9부(금융조사부)에서 시작된 SK 수사는 대검 중수부로 이어졌고, 본격적인 비자금 수사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에 대한 자금 지원과 최돈웅 의원에게 1백억원의 현찰이 건네진 진술, 그리고 이상수 의원에게 25억이 대선자금으로 건네진 진술 등이 나왔다.
▲ 이상수 의원이 “대선 당시 1백대 기업에 후원금을 모금했다”고 밝혀 파문이 커지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SK가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1백억원을 현금 지원한 사실이 밝혀지자, 정치권에서는 자연스레 다음 타깃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삼성그룹’으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기업 규모에 비춰볼 때 SK가 1백억원이라면 삼성그룹은 적어도 1백억원 이상의 대선자금을 지원하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에서였다.
이와 관련해 정·재계 일각에서는 ‘A그룹 4백억원, B그룹 5백억원, C그룹 7백억원 지원설’ 등이 나돌고 있다. 물론 이는 개별 기업들의 여야를 망라한 대선자금 지원 액수에 대한 루머들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실체를 드러낸 대선자금 지원규모는 SK의 1백36억원이 전부. 따라서 검찰이 SK 이외의 대기업으로 대선자금 수사를 확대키로 한 이상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추정이 정·재계를 초긴장시키고 있다.
대선자금이 어떠한 경로로 전달됐는지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자금을 지원받은 정치인은 물론, 편법으로 자금을 마련 정치권에 제공한 기업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검찰에서도 수사 범위를 놓고 수위 조절에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상수 의원이 지난 3월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대선 때 후원금 모금을 위해 1백대 기업을 다 돌아다니며 만났다”고 언급한 부분도 대선자금 수사의 폭풍을 예고케 하는 대목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까지 이름이 공개된 SK, 삼성, 현대차, LG 등 이외의 대기업에 대한 수사 확대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 의원이 밝힌 1백대 기업으로 수사 범위가 확대된다면 대선자금 수사는 국내 주요 기업들은 물론 정치권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
검찰의 고민은 두 가지. 기업 전반에 대한 수사로 이어질 경우 경제에 치명적일 수 있고, 그렇다고 주요 대기업만 조사하면 나머지 기업들에 대한 또다른 의혹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대선자금 규모와 관련, 정치권에서는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해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굿모닝시티와 관련,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던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가 2백억원 후원금 모금을 언급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SK로부터 25억원의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상수 의원은 후원금 영수증을 내보이며 ‘법적 절차’를 준수했다며 항변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지난 7월23일 대선자금 수입·지출 내역을 공개할 당시 SK로부터 지원받은 25억원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역시 민주당이 대선자금 내역을 공개하라는 압박에 ‘선관위에 신고한 이상 더 공개할 것이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다 SK로부터 현금 1백억원이 유입된 것으로 확인되자, 최병렬 대표, 이회창 전 총재, 의원·지구당위원장 등이 ‘사죄’하고 나섰다. 의혹이 제기되고 사실로 밝혀진 뒤에야 ‘도마뱀 꼬리 자르듯’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의혹이 제기되면, 정치권은 그에 맞춰 해명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선자금에 관한한 ‘말의 성찬’이 아닌 회계 장부를 통한 실사만이 대선자금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지적이 많다. 특히 계좌추적 등을 통해 ‘돈’의 유입경로와 규모를 파악함으로써 실질적인 대선자금의 규모를 파악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검찰이 계좌추적 등을 통해 대선자금 전모를 밝히기 이전까지 정치권의 해명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혼선과 혼란을 부추기기 위한 ‘물타기 전략’에 머물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인 것도 이런 까닭이다.
SK에서 시작된 ‘대선자금 판도라의 상자’는 과연 검찰의 수사를 통해 통째로 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선자금의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