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재보선을 목전에 두고 불거진 민주당 한화갑 대표의 방북추진 언급, 이회창 후보 장남 정연씨 병역비리 의혹에 대한 정치공세는 물론이고 민주당내에서 급류를 타고 있는 신당창당론까지 박 실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게 한나라당의 시각이다.
물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지지율 경쟁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모종의 정치 프로젝트가 진행중이고, 그러한 작업을 총괄지휘할 사령탑은 박 실장뿐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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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비서실장에게 정가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 ||
한나라당은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방북만 해도 ‘신북풍’ 공작이라고 주장한다. 한 대표가 김 대통령의 대리인으로서 방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을 성사시킴으로써 짧게는 이번 재보선에, 길게는 연말 대선에 영향을 주려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대표는 6~7일쯤 측근 의원 2~3명과 함께 김정일의 서울답방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며 “이는 청와대, 국정원, 민주당이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도라산 프로젝트’에 따른 것”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의원은 “도라산 프로젝트라는 문건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고 언급했다. 이같은 신북풍 공작에 박 실장이 깊숙이 관여돼 있다는 게 한나라당의 인식이다. 한나라당은 신당 창당론을 두고도 박 실장을 향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른바 ‘노풍’이 급격하게 사그라들면서 노 후보로는 대선승리가 어렵게 되자 ‘신당창당-제3후보 추대’의 시나리오가 추진되고 있다는 게 그 골자다.
한나라당 중진의원은 “지금 이대로는 올해 대선의 승부는 결정돼 있다. 노무현 후보는 결코 이회창 후보를 이기지 못한다. 이 점을 잘 아는 민주당과 청와대 핵심이 신당 구상을 추진중인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카드로는 대세를 엎지 못한다. 박지원 실장의 솜씨를 지켜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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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000년 방북을 마치고 돌아온 김 대통령의 귀국 보고 회 때 박 실장(맨 왼쪽) 등 공식수행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 ||
그렇다면 과연 김 대통령이 ‘탈정치-국정전념’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상황에서 물밑으로는 박 실장이 고도의 대선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청와대측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한다. 김 대통령이 지난 5월 민주당을 탈당한 이후 청와대는 일절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박 실장도 공·사석에서 “한나라당은 일만 생기면 나를 걸고 넘어지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모략이고 정치공세”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최근 정가에 떠도는 박지원 프로젝트설을 의식했음인지 박 실장은 지난 4일 기자들과 만나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은 어떠한 신당이나 어떠한 정치권 논쟁에도 관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실장이 현실정치에 개입하거나 임기말 DJ정권의 국정전반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의혹 제기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선 그가 서 있는 위치 자체가 그런 의심을 낳게 한다.
그는 연로한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며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이다. 박 실장은 지난 1·29개각에서 ‘정책특보’라는 직함을 달고 청와대에 재입성한 이래 끊임없이 유사한 풍설과 의혹에 시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3월13일 실시된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때도 당시 박지원 정책특보가 개입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한광옥 당시 대표가 범동교동계 후보를 자처하고 나선 P모 의원의 출마 포기를 종용하기 위해 수차례 설득하다가 실패했으나, P의원이 박 특보의 전화를 받고 포기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때도 박 실장은 도마위에 올랐다. 이인제 의원측은 경선 초기에 ‘노풍’이 불어 그전까지 요지부동이었던 이 의원의 1위 위치가 흔들리자 ‘음모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의원 캠프의 상당수 관계자들은 “노무현이 권노갑 고문과 박 특보 등 여권 핵심을 만나 ‘후보로 밀어주면 DJ 퇴임 이후를 보장하고 민주당 당권 등 일체를 포기하겠다’는 식으로 호소하고 다녔다”면서 “이인제를 껄끄럽게 생각한 여권 핵심이 노무현을 대안으로 선택, 광주에서부터 노풍이 본격적으로 불었다”고 주장했었다.
급기야 모 일간지가 “이인제 의원이 ‘노풍 배후에는 박 특보등이 개입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 이 의원측이 전면부인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7·11개각 시기와 장상 총리서리 선정을 두고도 박 실장은 구설수에 시달렸다. 우선 김 대통령의 차남인 홍업씨 비리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발표가 7월10일 이뤄지고 그 다음날인 11일 개각을 발표한 것도 정치감각이 뛰어난 박 실장의 작품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3남 홍걸씨에 이어 홍업씨가 구속수감되는 것을 계기로 ‘대통령 아들들 비리’로 범벅이 된 정국 이슈를 ‘개각’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또 김 대통령이 장상 이대 총장을 총리 서리로 임명한 것도 박 실장의 아이디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주요 신문들은 ‘최초의 여성총리 임명’을 일제히 1면 톱 제목으로 뽑았고, 언론의 생리를 잘 아는 박 실장은 이같은 방식의 이슈전환을 예상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 실장이 7·11개각을 통해 세칭 ‘비리정국’을 털어내고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의혹으로 정국을 전환하기 위해 ‘깜짝쇼’를 준비했다는 게 한나라당측 주장이다.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갖가지 ‘박지원 시나리오’들 중 가장 현실적인 주장은 장상 총리 임명 부분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직위 자체가 대통령에게 적당한 총리감이나 개각시기를 건의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이 아들 비리의혹으로 인해 원만한 국정수행이 어려운 상태에서 ‘아들 문제’를 조기정리하는 묘책을 내는 것 또한 임기말 비서실장의 의무로 볼 수도 있다.
민주당 총재직 사퇴에 이어 탈당까지 한 김대통령의 법적 신분으로 따져봐도 큰 하자는 없다. 그러나 신당창당,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비리 공세 등에 박 실장이 개입한다면 법적,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향후 대선정국 속에 요동치게 될 병역비리 공방과 신당창당론에 박 실장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