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영 치안감 | ||
경찰은 요즘 ‘불교에 귀의하겠다’며 명예퇴직을 신청한 서울경찰청 김기영 차장(54겺±활? 이야기로 술렁거리고 있다. 그의 경찰역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느닷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 차장은 간부후보생 출신으로 탄탄대로를 달려온 경찰 엘리트. 미래의 경찰청장감으로 거론되던 경찰조직의 ‘넘버 5’이기도 하다. 대체 그런 그가 장밋빛 미래를 내던지고 속세를 등지려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김 차장의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일단 마음먹으면 반드시 실행하는 그의 기질에서 또 다른 원인을 찾고 있다. ‘불심에 귀의하겠다’는 마음은 누구나 먹을 수 있지만 정상의 자리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웬만한 강단이 없으면 어렵다는 시각이다.
그의 성격을 대변할 만한 사건으로 거론되는 것이 1997년 ‘천호동 윤락과의 전쟁’. 그가 이른바 ‘천호동 텍사스촌’ 관할인 강동경찰서 서장으로 있을 때 진두지휘했던 프로젝트이다. 당시 그는 매일 경찰병력을 동원해 윤락업소 앞을 지켰다. 처음에 “새로 부임한 서장의 힘 과시겠지”라며 콧방귀를 뀌던 윤락업소 주인들은 그러나 이내 손을 들고 말았다. 그가 강동서장으로 있던 1년여 동안 이 프로젝트는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됐기 때문이다.
당시 강동서에 근무했던 한 경찰관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도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그 때문에 ‘독사’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그 일 하나로도 그분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 말입니다.” 김 차장은 당시 윤락업주나 업소 뒤를 봐주는 ‘어깨’들로부터 온갖 협박을 받았지만 참모들에게 “할 테면 해보라 그래. 천호동 윤락업소가 모두 문닫을 때까지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는다”고 주지시켰다고 한다.
해병대 출신인 김 차장은 ‘투철한 원칙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고질적인 불법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게 또 다른 피해를 막는 최선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서울경찰청 기동단장, 경비부장을 지낼 당시 시위진압 방식에서도 그의 그런 성격은 그대로 드러났다.
스스로 ‘경비통’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그는 시위 현장에 나가는 부하들과 동고동락했다. 반드시 현장에 나가 병력을 지휘했다. 치안감으로 승진해 서울청 차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큼지막한 시위는 그가 무선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무영 청장시절, 이 청장이 자랑으로 내세운 ‘립스틱라인’(여경을 시위대 앞에 줄 세우는 폴리스라인)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사석에서 그는 “흥분한 시위대들이 앞에 선 여경들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 시위진압을 장난으로 아느냐”며 불법시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김기영 치안감이 ‘속세’를 떠나면서 그의 마지막 일터가 된 서울경찰청 | ||
실제로 그는 또 ‘화염병을 던지거나, 가스통으로 화염시위를 하는 격렬시위 현장에서는 고무총탄의 사용을 허용하자’고 주장, 논란을 부른 적이 있다. 결국 고무총탄 건은 좌절됐지만 그는 시위현장에서 경찰이 무력화되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경찰이었다.
경찰이 무너지면 더 크고 위험한 혼란을 부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그는 특유의 시위진압법을 내놓기도 했다. 방패를 이용한 대응법이 그것. 각목이나 쇠파이프로 공격하는 시위대를 방패를 무기 삼아 밀어붙이는 것. 경찰이 합법적인 범위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시위진압 방식인 셈이다.
시각에 따라 김 차장의 이런 면모에 대한 평가는 궤를 달리하지만 그가 경찰조직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원리원칙이 뚜렷했던 간부라는 데엔 다른 목소리가 없다. 그가 장래의 경찰총수감으로 거론됐던 것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부하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홀연히 경찰조직을 떠난다고 하니, 동료나 부하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하지만 김 차장을 가까이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결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경남 김해 출신인 그의 부친은 알려졌다시피 승려였다. 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김 차장은 동국대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졸업뒤 시험을 치러 간부후보생으로 경찰에 입문했지만 평소 “은퇴한 뒤 아버지처럼 불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아버지가 지키던 사찰이 아버지 사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점에 대해 두고두고 가슴앓이를 했다는 후문이다.
평소 그의 집무실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거나 문서가 쌓여있은 적도 없었다. 그리고 사무실에선 물 흐르는 소리가 항상 들렸다. 작은 분수나 돌을 넣은 수반에 물을 흐르게 해 그는 일을 하면서도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그는 테니스 마니아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의 매일 인근 공원이나 체육시설 코트에 나가 테니스를 쳤다. 혹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야외에서 치는 테니스를 통해 위로했던 것은 아닐까. 특이하게도 그는 부속실에 여직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이유는 집무실에서 종종 운동을 즐기는데 여직원이 있으면 옷갈아 입기에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가 과연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는 속세와 등지는 연습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산사로 떠나려 한다는 소식에 가장 몸이 단 것은 가족들이다. 그는 몇 달 전 큰딸을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아래 딸이 또 한명 있다. 가족은 물론 부하들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지난 2일 열흘휴가를 떠나면서 사무실 짐을 아예 싸 갔다. 지난 99년 창원지검장 출신으로 차관급인 감사원 감사위원으로 공직생활을 마친 신상두씨(당시 60세)가 퇴임 직후부터 산사에 칩거하며 참선 수행해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창창한 현역’인 김 차장의 사연은 이보다 ‘충격적’이다.
김 차장의 성격을 잘 아는 이들은 그가 결정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간부후보생 23기 선두주자로 경찰총수까지 오를 인물로 손꼽히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사로 들어간다는 소식은 세속에 얽매인 삶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 한 번쯤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박상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