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두한 | ||
한 시대를 풍미한 김두한이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은 당시에도 믿어지지 않는 뉴스였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김두한은 타살당했다’는 기사가 보도될 정도다.
하지만 김두한의 사체에는 타박흔적이 없었다. 따라서 ‘(뇌출혈로 인한) 뇌졸중’이라는 병원 발표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점은 김두한을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두한의 장녀 을동씨(탤런트)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긴 사람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숨진 과정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면서 “그렇다고 아버지가 타살됐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고개를 저었다.
김두한의 죽음은 ‘국회 똥물투척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한마디로 화병으로 숨졌다는 것. 하지만 최근 또 다른 진술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른바 ‘김두한 린치사건’이다. 주먹세계에서 이 사건은 금기시되고 있다. 감히 누가 당대의 주먹 김두한을 욕보인 것인가.
김두한과 동갑친구이자, 같은 안동 김씨 핏줄로서 주먹세계를 함께 주름잡은 김동회씨(84). 그는 최근에야 ‘김두한 린치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김두한이 실제 주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까마득한 후배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하극상을 당해 린치로 인한 것보다 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가감없이 옮겨본다.
“두한이가 숨지기 4∼5개월 전이었지. 갑자기 두한이가 이유는 묻지 말고 자기 사무실로 급히 좀 오라고 전화가 왔어. 난 그때 두한이랑 서운한 일이 있어 왕래를 안 할 때였는데 너무나 다급한 목소리여서 급히 찾아갔지. 두한이는 종로 금봉빌딩 3층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자기 사무실로 찾아가니까 얼른 문을 걸어 잠그더니 이러는 거야. ‘동회야. 이거 참 어떡하니. 나 원 참 세상에…’라며 잔뜩 상기돼 말을 잇지 못하더라구.
얘기인즉, 아침 출근길에 ‘똘마니 김○섭’에게 망신당했다는 거야. 정릉 버스정류장으로 버스를 타려고 나오는데 아 그놈이 사람들이 많이 보는 데서 ‘야 네가 김두한이냐. 한판 뜨자’라고 했다는 거야.
워낙 까마득하게 밑의 애여서 두한이는 망신스러워서 대꾸도 안 하는데 그놈이 길길이 날뛰면서 난리를 쳤나봐. 사람들이 말리는 사이 두한이는 급히 자리를 피했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큰일은 없었지만, 이 얼마나 망신이냐. 천하의 김두한이가.
▲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야인시대>에 서 김두한 역을 맡은 안재모의 모습. | ||
바로 사무실 앞 하동관(곰탕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내가 두한이에게 다시 울타리가 돼 주마 약속을 하면서 위로하는데, 거기서 일이 벌어진 거야. 두한이가 숟가락으로 뜬 밥을 먹지 못하고 입에 들어간 음식이 줄줄 새나오더라구.
순간적으로 오른팔을 못쓰고 반신이 마비되는 것이었어. 충무로 앞 노 박사 병원, 청구동 이 박사 병원을 거쳐 화신백화점 뒤 장 박사 병원에 입원시켰지. 그 사람, 똘마니에게 당한 분을 참지 못하고 뇌출혈을 일으킨 거야.
결국 성모병원으로 옮겨 입원하면서 우리가 당시 침술로 유명한 50대 여인을 불러 두한이 전신에 침술치료를 한 끝에 그 사람을 살려냈지. 그리고 퇴원하고 잘 지내는 것 같다가 11월21일 길에서 쓰러지고는 영영 일어나지 못한 거야.” 김동회씨는 김두한이 부하의 배반 때문에 숨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김두한의 동지들은 ‘김○섭’이라는 인물이 누군가에게 매수당해 김두한을 의도적으로 괴롭혔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배후로 지목한다. 1984년 이용씨가 낸 <대의:실록 김두한>(홍익출판사)에는 김두한의 동지들이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제기한 의혹들이 담겨있다.
김두한은 1964년 8월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민중당 의원들이 사퇴해 발생한 서울 용산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다.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이념을 계승한 한독당 소속으로 국회에 다시 진출한 것. 7년간 정치공백을 깨고 입성한 그는 국회 첫 연설부터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을 공격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두한은 당시 김종필씨와 친분이 깊었다. 이후락과 김형욱이 자신들의 정적인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해 김두한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1966년 1월8일 김두한 의원을 비롯한 한독당 당원 10여 명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사제폭탄까지 만들어 교외에서 실험했다고 발표, 김두한을 구속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20일 만에 풀려났지만 몸이 말이 아니었다. 김두한은 이후 말이 없었다.
그러나 8개월 후인 9월16일 ‘한비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걸게 된다. 삼성 산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비료공장의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한다고 속이고, 수입금지품인 사카린 원료를 58t 들여온 것이다.
김두한은 9월2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정부질의를 신청하고 연단에 올라가 미리 준비한 똥물을 정일권 내각의 국무위원들에게 던졌다. 이 일로 그는 의원직을 사직하고 구속돼 역시 고문을 당한다.
두 차례 고문은 김두한을 병들게 했다.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만섭씨는 그의 자서전 <증언대>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똥물투척은 김종필씨의 지령’이라고 보고해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김두한이를 데려다 어떻게든 자백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씨는 김두한이 정보부에 끌려가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석방된 뒤 한 식당에서 보니까 그토록 건장하던 사람이 폐인이 되다시피 변해 있었으며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있었다고 증언했다.
두 차례의 모진 고문 등으로 내상을 입었던 ‘상처입은 호랑이’ 김두한. 산중의 제왕’이었던 그가 설상가상으로 ‘토끼’(김○섭)에게서까지 공격을 받게 되자 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울화가 쌓였고 결국 이로 인해 생명까지 재촉하게 됐다는 게 김두한 패밀리 일각에서 전해져 오는 ‘김두한 사망 스토리’다. 박상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