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면도사를 살해한 이동식의 검거 당시 모습. 사진출처=중앙일보 1983년 1월 21일자
경찰은 곧 피해자 주변 인물 수백 명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주변 인물들은 그녀의 본명을 전혀 몰랐고, ‘진양’이라는 예명으로만 불렀다고 한다. 수사 초기에 김 수사지도관을 비롯한 수사팀은 ‘치정’ 관련 범행으로 가닥을 잡아 탐문을 벌여갔다. 김 씨의 단골 손님을 일일이 조사하던 중 자신을 사진작가로 소개한 한 단골이 그녀를 자주 찾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사진작가의 집으로 찾아간 경찰이 “진양을 아느냐?”고 묻자, 사진작가는 태연하게 “안다. 단골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진작가의 이름은 이동식(당시 42세). 본업은 보일러 배관공이나, 각종 공모전에서 11차례에 걸친 수상 경력을 갖고 있었고 개인전을 연 적도 있었다.
서기만 당시 수사반장이 “사진을 좀 보자”고 청하자, 그가 자신의 작품 100여 장을 내놨다. 대부분이 여성의 나체 사진으로,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모습, 목을 맨 모습, 시체를 가장한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이상하고 기괴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수사팀이 사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동식이 갑자기 문갑과 벽 사이의 공간으로 사진 1장을 급히 밀어 넣는 것을 서 반장이 포착했다. 사진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갈색 부츠에 회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낙엽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하얀 천으로 가려져있었다. 한 마디로 ‘사체성애증’을 표현한 사진이었다.
서 반장이 사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하자, 이동식은 “모델을 고용해 연출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1장만 남아 있는 이유를 묻자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버렸다”고 주장했다.
피해 여성이 서서히 죽어가는 장면을 찍은 문제의 사진들. 사진출처=사진과 페티시즘
체포된 이동식은 말을 바꿨다. 그는 “진양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사진을 찍고 보냈다”며 “내가 가고 난 후 여자가 자살했나 보다”라고 발뺌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또 다른 단서를 찾았다. 김 씨로 밝혀진 사진 뒷면에 적혀진 현상소를 찾아간 것. 경찰이 찾아간 현상소는 종로에 위치한 무허가 현상소였다. 현상소 직원은 이동식이 그동안 맡겼던 수상한 사진들에 대해 “범죄 현장 검증 사진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직원은 “이동식이 경찰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경북 대구 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그 후 그는 숙부 집으로 보내져 초등학교를 마치고 14세 때 상경했다. 이동식은 수유리 소재 재건대(1962년 정부에 의해 조직된 넝마주이 단체)에서 15년 동안 폐지, 고철 등을 수집하며 넝마주이로 살았다. 23세 때 처음 특수절도로 전과를 얻었고, 검거 당시 전과 3범이었다. 그는 1970년대에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력도 있었다.
그가 김 수사지도관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준 열쇠고리엔 손가락 마디만한 물체가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수사팀은 그것을 보고 사람 귀라고도 했고, 낙타 눈알인 것 같다고도 했다. 김 수사지도관은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일부인 것 같았다”며 “이동식은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고 떠올렸다. 당시 이동식은 “이걸 지니고 있어 베트남전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뒤늦게 사진에 취미를 붙이게 된 이동식은 한 사진공모전에서 닭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입상하면서 사진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 후 유수의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면서 1982년 한국사진작가협회에 가입했고,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진을 찍는 작가’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는 일본 누드 사진집을 탐독하면서 성과 죽음의 이미지에 빠져들었다.
한편 수사팀은 이동식의 집에서 숨진 김 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 21장을 찾아냈다. 수사팀은 처음 호압산에서 발견됐을 당시의 현장 검증 사진 속 나체 사진과 옷을 입고 천을 덮고 누워 있는 초기 압수 사진을 비교하는 새로운 기법을 채택했다.
이동식 살인사건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
김 수사지도관에 의하면 처음 21장의 사진을 입수했을 때 그것이 희생자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아무도 포착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급기야 사진 분석을 위해 일본에 사진을 보내 감정 의뢰를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던 와중에 김 수사지도관이 사진작가 친구 김문환 씨와 상의했고, 결국 사진작가협회 홍순택 신구대 교수가 수사팀에 합류해 사진 분석을 시작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당시 의사가 아닌 사진작가를 찾은 것이 특이한 점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사진전문가인 홍 교수 덕분에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홍 교수와 김문환 씨는 사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희생자의 명지털 모양을 살폈다. 사후엔 인체의 명지털이 서서히 눕게 되는데, 희생자의 명지털 모양이 21장의 사진에서 시간 순서에 따라 제각각 달랐던 것이다. 홍 교수는 21장의 사진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다. 그 결과 김 씨에게 청산가리를 먹여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포착한 ‘죽음 연출’ 사진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김 수사지도관은 “범행현장은 이승만 정권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별장이 있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동식의 집에서도 공업용 청산가리가 발견됐다. 보일러 기사들이 흔히 쓰는 공업용 청산가리를 범행에 쓴 것이었다.
김 수사지도관은 이동식에 대해 “전과가 있어서 경찰 다루는 법을 알더라. 고단수였다”라며 “거짓말을 끝도 없이 반복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정신 이상자 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동식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였느냐”는 질문엔 “거짓말을 잘하는 전형적인 범죄자였다. 사이코패스는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이동식은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 그것은 예술이다. 나는 예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런 것을 늘 동경해 왔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동식 사건을 담당했던 김 수사지도관은 “전율과 쾌감을 맛보기 위해 죽음을 연출한 광적인 작가의 범행”이라고 결론지은 뒤 “범죄 현장을 하나의 무대로 보고 사건을 재구성, 연극의 대본분석기법을 이용해 경찰의 살인사건 분석에 이용한 사례”라고 자평했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
실종된 전처도 혹시…
다음날 만난 두 사람은 금천구 호압산 중턱으로 이동했다, 감기약 캡슐 안에 넣은 청산가리를 김 씨에게 먹인 이동식은 미리 설치한 2대의 니콘카메라로 약기운이 퍼진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김 씨의 모습을 21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김 씨가 숨이 끊어지자 사체를 낙엽으로 덮은 후 옷가지와 신발을 40m 떨어진 곳에 버렸다.
하지만 이동식의 처벌을 위해선 원본 필름이 꼭 필요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이동식은 “필름을 사무실 벽에 넣고 벽지를 발랐다”고 순순히 자백했다. 수사팀은 벽 안에서 필름 원본을 찾아냈다.
한편 사건이 연일 대서특필 되자 전처 방옥수(당시 31세)의 가족이 수사팀을 찾아와 8년 전 실종된 방 씨를 찾아달라고 신고했다. 특히 방 씨의 남동생은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누나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사진 한 장을 건네줬다”며 “누나가 일본에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더라”고 진술했다. 평소 이동식이 자신의 후처를 모델로 삼아 온갖 기괴한 사진을 찍었던 것을 생각하면 해당 사진 역시 이동식이 촬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수사팀은 그것이 어떤 사진인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이동식이 수사팀을 제 맘대로 농락하며 슬며시 “전처를 죽여 파묻었다”고 지시한 장소에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해외로 타전된 사건이 크게 이슈가 되면서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한 당시 군사정권이 “사건을 빨리 덮으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수사팀은 여죄를 캐내지 못했다.
서기만 당시 수사반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동식의 일기장에 의하면 21명의 희생자가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김 수사지도관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당시 언론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며 “현재에 와선 알 수 없다. 말만 무성하고 실제로 나온 것은 없다”고 섣부른 추측을 삼가할 것을 당부했다.
사건 발생 4년 후인 1986년 5월 27일 서울구치소에서 이동식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21장의 사진들은 사형 직후 일본과 프랑스의 잡지사에 고가로 팔렸다고 하나, 사실 확인은 하지 못했다.
한편 이동식 사건은 해외에서도 커다란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사진 비평가 이이자와 코타로는 <사진과 페티시즘>에서 다음과 같이 이동식 사건을 논평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수많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일제히 톱뉴스로 다뤄졌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 내부에 이와 같은 ‘죽음에 이르는 사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죽음’의 이미지가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인 ‘성’의 이미지와 결부될 때, 그 사진은 우리들에게 더 없이 강렬한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이다. (중략)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동식의 행위를 큰소리로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사진’을 보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강렬한 욕망을 은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촬영한 사진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사진은 이상하게 매력적이다. 그중 몇 장은 아무리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분류하고, 고정하려 해도 그 광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모든 의미를 초월한 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경험의 절대성을 우리들은 (살아 있는 동안엔) 경험할 수 없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