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만난 대한전선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설 전 사장이 부회장에서 사장으로 스스로 직급을 낮춘 후였고 대한전선 본사가 서울 회현동에서 경기도 안양으로 옮기기 직전이었다. 당시에도 2010년부터 본격화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대한전선이 수년간 시달려온 유동성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오히려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던 상태였다.
설윤석 전 사장은 만 23세이던 2004년 미국 유학 계획을 접고 부랴부랴 대한전선에 입사했다. 아버지인 설원량 회장이 뇌출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탓이었다. 설 전 사장은 대한전선 전무, 부사장 등을 거쳐 2010년 오너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1300억 원이 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상속세를 납부해 재계 모범사례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된 후계자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입사 후 내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제 목소리 한 번 크게 못내 본 설 전 사장은 결국 회사를 살리겠다는 취지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대한전선 건물 전경. 설윤석 전 사장 일가가 보유한 ‘알짜’ 회사 대한광통신은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알려졌다. 구윤성 인턴기자
금융권 관계자는 “출자전환만이 살 길인데 오너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면 오너에게 좋은 일만 하는 셈”이라며 “결국 오너가 없어져야 채권단의 출자전환도 용이하고 회사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설씨 가문이 대한전선 내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너가 있는 기업에서 오너가 권력다툼을 통해 밀려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대한전선 내의 특수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한 일이다.
2004년 대한전선에 발을 디딘 설 전 사장은 2010년에야 비로소 오너 부회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때까지 경영수업을 받은 셈. 그러나 그 6년 동안 회사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갔다. 1955년 설립 이후 전선업계 1위 자리를 지키며 53년간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던 대한전선은 설원량 회장이 갑작스레 떠난 후 급격히 변화했고 쇠퇴했다. 무분별한 사세 확장과 투자가 결정타였다.
왼쪽부터 고 설원량 회장, 설윤석 전 사장.
이 같은 확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대한전선의 위기가 본격화한 시기는 2009년. 이 해 설립 이후 처음으로 흑자 행진이 멈췄으며 차입금은 2조 5000억 원에 달했다. 주채권은행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은 것도 이 해다. 뒤늦게 자산 매각 등 구조조정에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급하게 매물로 내놓다보니 턱없이 낮은 가격에 팔 수밖에 없었고 매각 대금으로 빚을 갚았지만 대신 자본금이 빠져나가면서 부채비율은 오히려 높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설 전 사장이 부회장에 오른 2010년은 상황이 더 악화한 후였다. 좋은 상황이었어도 어린 오너로서 부담스러웠을 텐데 설 전 사장은 최악의 상황에 오너 부회장에 오른 셈이었다. 대한전선 출신 한 인사는 “그때는 이미 보유 자산을 아무리 매각해서 빚을 갚아나가도 도저히 개선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다”고 되돌아봤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설 전 사장은 임 전 부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망쳐놓은 회사를 살리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라며 “이후에도 채권단이나 기존 경영진 등쌀에 설 전 사장이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 전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횡령 배임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그러나 설 전 사장의 퇴진이 권력다툼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고개를 젓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앞의 대한전선 출신 인사는 “오너가 있는 기업이면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오너와 힘겨루기를 하거나 오너가 권력다툼에서 밀려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대한전선 경영진의 지상과제는 설 전 사장을 보호하고 보필하는 것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 인사는 “다만 경영진을 살필 수 있는 오너가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벌써 설 전 사장의 재기를 전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하면 지분이 희석되는 데다 그나마 설 전 사장과 양귀애 전 명예회장 등 오너 일가 보유 지분도 대부분 채권단에 담보로 잡혀 있다. 재계로 복귀한다 하더라도 대한전선을 다시 지배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고금리 대신 경영권 획득
설윤석 전 사장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채권단의 출자전환을 쉽게 하기 위해서다. 출자전환이 이뤄진다면 연말 우려되던 대한전선의 자본잠식 상태를 피하고 회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설 전 사장의 자진 퇴진에는 채권단의 입김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설 전 사장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채권단은 대한전선이 안고 있는 대한전선 부채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에 대해 출자전환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자전환이란 쉽게 말해 채권단(은행)이 빌려준 돈(회사 부채)을 회사 자본금으로 전환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회사의 부채비율이 낮아져 회사가 완전히 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오너가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출자전환을 한다면 오너에게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은행이 살려준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너가 경영권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또 출자전환을 하면 오너의 지분은 희석된다. 비유하자면 ‘소맥’에다 맥주를 더 탄 격이다. 여기서 소주는 대주주 지분이고 맥주는 외부 자금을 말한다.
채권단 입장에서는 그동안 빌려준 돈에 대해 고금리 이자를 받아 수익을 챙겨왔는데 출자전환을 하면 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하는 까닭은 회사가 쓰러지거나 법정관리로 가기보다 재무구조를 개선해 구조조정을 하고 훗날 매각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각을 통해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다.
대한전선 출신 한 인사는 “어떻게 보면 설윤석 전 사장과 채권단의 윈-윈일 수 있다”며 “설 전 사장은 알짜 회사인 대한광통신을 거느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채권단은 대한전선을 깨끗하게 만들어 매각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설 전 사장과 채권단의 이 같은 약속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하고 있다. 때마침 채권단 측은 대한전선을 정상화한 후 매각할 계획이며 대한전선그룹 구조조정에서 대한광통신은 제외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어떻게 보면 채권단이 가장 큰 이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며 “법정관리를 막았으니 그동안 챙긴 이자가 쏠쏠한 데다 이제는 경영권까지 챙긴 것”이라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