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 형제의 비극적 사건을 TV 영화화한 <레이티드 X>의 한 장면.
그 모든 것은 세 편의 영화에서 시작되었다. 1972년에 나온 <목구멍 깊숙이>는 주류 관객들이 환호했던 최초의 포르노였다. 같은 해 나온 <녹색 문 뒤에서>는 ‘아트 포르노’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73년에 나온 <데블 인 미스 존스>는 그 해 북미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면서 포르노가 더 이상 음지의 영화가 아님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승승장구의 이면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목구멍 깊숙이>의 린다 러브레이스는 남편이자 매니저이자 포주였던 척 트레이너에 의해 육체는 물론 정신마저 착취당했다. 척 트레이너의 두 번째 아내는 마릴린 챔버스. 그녀는 <녹색 문 뒤에서>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결국 술과 마약으로 고통받다가 57세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데블 인 미스 존스>의 조지나 스펠빈도 술 때문에 갱생원에 들어가야 했다. 많은 배우들이 1980년대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하지만 미첼 형제만큼 강렬한 사건의 주인공은 없었다. 형 짐 미첼과 동생 아티 미첼. 두 살 터울이던 그들은 포르노 업계를 좌지우지하던 거물급 인사였으며, 1969년에 세운 오패럴 씨어터는 포르노도 상영하고 영화도 제작하고 스트립 클럽으로도 활용되던 샌프란시스코 환락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포르노의 예술성을 고민했고 그 결과 6만 달러의 제작비로 <녹색 문 뒤에서>를 만들어 25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미첼 형제는 술에 절어 살았고 당대의 자유분방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마약에 손을 댔다. 오패럴 씨어터의 댄서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과 항상 분쟁이 있었고 가끔은 여성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형인 짐 미첼은 스스로 알코올 클리닉에 들어가는 등 갖은 노력을 통해 수렁에서 빠져 나왔다. 하지만 동생인 아티 미첼은 여전히 사무실에서 향락에 젖어 있었다. 짐의 주변 사람들은 아티에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부추겼다. 그리고 1991년 2월 말의 어느 비 오는 날 밤 짐은 아티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손엔 아버지의 유품인 22구경 리볼버가 있었다.
미첼 형제의 실제 모습. 오른쪽이 형 짐 미첼이다.
1997년에 출옥한 그는 동생의 이름을 딴 ‘아티 펀드’를 조성해 마약 중독자들을 도왔다. 하지만 아티의 유족들은 짐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동생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죄를 세탁하려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블로그를 통해 짐의 범죄는 미리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으며 부를 독차지하려 했던 탐욕과, 자신보다 더 많은 재능을 지녔던 동생에 대한 질투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포르노를 만들며 겪었던 일들도 원인으로 제시됐다. 그것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1975)는 결정적 계기였는데 그들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촬영까지 사사건건 부딪혔고, 급격한 제작비 상승을 겪으며 갈등은 극에 달했다.
형이 동생을 죽인 비극적 사건은 2000년 <레이티드 X>라는 TV 영화로 제작되었다. 역시 형제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즈와 찰리 신이 각각 짐과 아티 역을 맡았다. 이 영화의 입장은 짐이 아티를 쏜 건 ‘그럴 만한 일’이라는 것. 이 영화는 짐이 일종의 정당방위로 아티에게 총을 쏘았다고 이야기한다. 출소 후 짐의 아들이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 씁쓸한 일이 있기도 했다. 한편 짐은 2007년 64세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1991년에 46세로 세상을 떠난 동생 아티 곁에 나란히 묻혔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