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문제와 원전 사태 등을 놓고 우리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은 양적완화를 앞세운 ‘아베노믹스’를 통해 본격적인 경기 회복세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근혜노믹스’가 방향을 잃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양적완화와 재정투입, 성장추구라는 세 가지 목표를 명확히 한 뒤 주변국의 비난과 우려 따위는 무시한 채 경기 부양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자민당 지지기반인 농민들의 반발에도 TT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까지 추진할 정도다.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자국 농업의 피해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오찬.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래 사진은 대기업 회장단과의 오찬. 사진제공=청와대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경기 부양과 복지 확대라는 두 가지 경제 정책을 한꺼번에 추진하기 위해 지난 5월에 5조 4000억 원 규모의 추경안을 편성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같은 상황이 아닌 때에 마련된 추경안이었지만 여당(경기 부양)과 야당(복지 확대)의 속셈이 일치하는 것이어서 아무런 문제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는 올해 예산과 추경을 합한 303조 8000억 원 중 71.6%에 해당하는 217조 5000억 원을 상반기 중 사용하라며 부처를 독려했다. 상반기에 예산을 조기 집행함으로써 가라앉을 우려가 있는 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여기에 늘어난 복지예산 지출을 통해 국민들이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복지가 확대됐다는 것을 체감하도록 하는 것도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 흐름은 최근 돌변했다. 예산안을 짜면서 잡아놨던 세입에 구멍이 뚫린 때문이다. 올해 정부가 예상한 세입은 총 210조 4000억 원이지만 한 해의 반환점인 지난 6월까지 걷힌 세금은 46.2%에 불과한 97조 2000억 원에 그쳤다. 이 흐름대로 갈 경우 예상보다 세입이 10조 원 이상 줄어들 처지에 놓인 것이다. 연말에 세입이 없어서 지출을 줄여야 하는, 이른바 재정절벽에 처할 위기에 빠진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정부의 지시 사항은 4개월 만에 백팔십도 바뀌었다. 정부가 9월 들어서면서 각 부처에 불용액(편성된 예산 중 쓸 필요가 없어진 예산)의 목표치를 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을 남김없이 쓰라던 정부가 이제는 돈을 최대한 아끼라고 말을 바꾼 셈이다. 당장 구멍이 날 수 있는 세입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이럴 경우 경기 부양을 위해 편성한 추경안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지난 2008년 이후 매년 예산 불용액은 5조 원 이상 발생하고 있다. 2008년 불용액은 5조 5553억 원, 2009년 5조 1667억 원, 2010년 5조 5344억 원, 2011년 5조 8024억 원, 2012년 5조 7221억 원 수준이다. 이러한 액수를 감안할 경우 올해 10조 원 세수 부족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4조 원 이상의 사업비 지출을 추가로 줄여야 한다. 추경으로 늘린 예산 5조 4000억 원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세입 부족 사태는 예산안 집행 여부뿐 아니라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라는 또 다른 오락가락 행보를 초래했다. 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바로 중소기업중앙회를 방문해 ‘중소기업 대통령’임을 내세웠다. 이러한 박 대통령 행보에 각 부처는 앞 다퉈 각종 경제민주화 법안을 내놓았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경제민주화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민주화 흐름은 대기업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표류하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청와대 회동 때와는 달리 올해 투자를 줄인 것이다. 삼성, 현대차, SK, LG, 4대 그룹이 내놓은 올해 투자계획은 95조 6000억 원이었지만 상반기 실제 집행한 액수는 3분의 1 수준인 33조 4000억 원에 불과했다. 기업들의 투자 감소가 세입 감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자 정부는 경제활성화로 방향타를 급하게 틀었다. 그러면서 국회에 경제활성화를 위해 국회에 제출된 100여 개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달라고 읍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야당의 문제 제기를 무시하면서 경제활성화 법안 통과만을 요구하는 것 또한 모순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지난해 국회는 여야 합의로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상정을 제한하고, 본회의 무제한 토론을 허용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야당의 협조 없이는 어떠한 법안도 국회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특히 정부와 여당이 경제활성화를 위해 중요시하는 세법개정안과 부동산시장 활성화 대책, 외국인 투자촉진법 등은 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통과 자체가 쉽지 않다.
한 전직 관료는 “정부와 여당은 경제활성화로 방향을 틀었다고 하지만, 야당은 아직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고 있어 정부 법안이 원안대로 처리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또한 박 대통령이 국정원 대선개입 등 야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 해결을 도외시하면서 법안 통과를 위해 야당을 압박하는 전략을 쓰는 한 야당의 협조를 끌어낼 수는 없다”며 “이러한 모순된 행보는 단순히 불통이라는 비판을 불러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경제 운용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준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