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산하에 있는 ‘국가디지털포렌식 센터’는 과학적 수사 기법으로 각종 미제사건을 밝혀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 수사관이 증거물에서 혈흔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사건을 면밀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B 씨가 이미 사망한 터라 범행이 A 씨의 소행이라고 특정하긴 어려웠다. 또 상반신에 화상을 입은 A 씨는 “화상 치료를 받겠다”며 병원을 오가는 상태라 수사를 원활히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경찰은 A 씨를 불구속으로 검찰에 송치하기에 이른다.
A 씨는 경찰조사에서 “여자 문제로 크게 다투긴 했지만 나는 방 밖에 있었고 B 씨가 담뱃불을 붙이겠다고 라이터를 켠 것”이라고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했다. 실체가 좀처럼 밝혀지지 않았던 사건은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가 투입되면서 급반전됐다. NDFC 산하 과학수사담당관실 화재분석팀은 화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화재분석팀은 무엇보다 A 씨의 화상자국에 주목했다. A 씨의 화상이 오른손에서 목덜미로 이어져 있었던 것. 더군다나 방 밖에 있었다던 A 씨는 유증기(기름이 기화해 나오는 증기)로 인한 화상을 입었다는 점에서 화재 당시 B 씨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이밖에도 화재가 문에서 방 안쪽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결국 화재분석팀은 “A 씨의 ‘오른손’으로부터 최초 발화가 추정된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화재분석팀의 분석이 끝나자 이후에는 진술분석팀이 투입됐다. 과학수사담당관 김범기 부장검사는 “진술분석기법은 진술분석관들이 피해자와 피의자들을 직접 면담하고 영상 녹화해 이를 사건 기록과 일일이 대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말의 근거, 일관성, 신빙성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에 신체적 변화를 체크해서 진위를 가려내는 거짓말 탐지기와는 다르다”라고 전했다. A 씨의 진술은 번번이 현장 증거와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진술분석팀은 A 씨의 진술을 ‘거짓’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해 검찰은 지난 8월 A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해 발부했고 결국 A 씨는 현주건조물방화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기에 이른다. 베일에 가려졌던 방화 살인 피의자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NDFC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NDFC 산하 또 다른 팀인 DNA 수사담당관실은 DNA를 토대로 사건의 전후맥락을 밝히는 전문 부서다. 지난 7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강간미수사건은 이번 과학수사 우수사례로 선정될 만큼 극적인 DNA 수사였다.
지난 7월 6시 새벽 4시 10분쯤 서귀포시 월평동에 있는 한 주택에 괴한이 침입했다. C 씨는 미리 준비한 장갑을 착용하고 칼을 손에 들었다. 얼굴은 집 앞 빨래건조대에 걸려 있는 집주인의 옷으로 반쯤 가린 상태였다.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집주인 D 씨(여·68)는 갑작스런 C 씨의 침입에 화들짝 놀랐다. 칼을 겨누면서 강간을 시도하려는 C 씨에게 집주인 D 씨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D 씨는 “화장실에 갔다 온 후 요구사항을 다 들어 주겠다”고 C 씨를 안심시킨 후 그대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D 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집 인근에서 배회하고 있던 C 씨를 붙잡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C 씨는 D 씨의 집을 침입한 것은 인정했지만 그 이후의 범행에 대해서는 만취해 일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경찰은 C 씨가 갖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칼을 국과수에 유전자감정 의뢰하였으나 C 씨의 유전자 또한 검출되지 않았다. 장갑을 낀 탓에 쉽게 유전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왼쪽부터 화재수사, 문서 감식, DNA 검출. 사진 출처=NDFC
뿐만 아니라 C 씨가 훔쳤던 피해자의 옷도 유전자 분석 결과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C 씨의 입이 닿은 부분에 C 씨의 유전자가 검출됐고, 옷 겨드랑이 부분에서 피해자 D 씨의 유전자가 검출됐기 때문이다. D 씨의 옷을 C 씨가 ‘복면’으로 사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배용원 DNA수사담당관은 “입술이 닿는 경우나 침이 묻은 경우, 심지어 여드름이 닿아도 유전자는 검출될 수 있다. 옷을 빨더라도 살이 많이 닿는 겨드랑이 부분에서는 유전자는 검출되기 마련이다”라고 전했다.
지난 2월 8일 서울 광진구에서 발생한 강도미수 사건도 숨어 있는 유전자를 찾아낸 대표적인 경우다. 피해자의 물건을 빼앗으려다 경비원의 제지를 받아 당황한 피의자는 너무 급하게 달아나는 바람에 신발 한 쪽이 벗겨진지도 모르고 범행현장에서 사라졌다. NDFC는 범행 현장에서 입수한 신발에서 남성 1인의 DNA를 검출하는데 성공했고 대검 DNA-데이터베이스 자료를 검색해 피의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번 우수 과학수사 사례 중에는 15년이 흐른 미제사건을 밝혀낸 사례도 있었다. 지난 1998년에 발생한 ‘구마고속도로 여대생 살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98년 10월 17일 새벽 5시 30분쯤 구마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서 여대생 정 아무개 양(당시 18세)이 시속 100km로 달리던 23톤 덤프트럭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경찰은 정 양의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로 종결했으나 유족들은 부실수사 의혹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 양이 새벽 5시에 혼자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을 한 점과 시신에 속옷이 없었다는 점은 유족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재수사는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영영 묻힐 뻔했던 사건은 15년이 지난 2013년 9월 서서히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검찰은 부검 재감정과 DNA 대조, 교통사고 시뮬레이션, 최면검사 등 각종 수사기법을 총동원했다. 그리곤 당시 사고 현장 인근에서 찾아낸 정 양의 속옷에서 검출해 보관해온 남성의 DNA가 2011년 청소년 성매수 혐의로 처벌받은 한 스리랑카인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포착해냈다. 결정적인 증거로 포착한 사건의 전말은 외국인 근로자로 한국에 들어 온 세 명의 스리랑카인이 정 양을 구마고속도로 인근 굴다리로 끌고 가 성폭행을 하고 이후 경황이 없던 정 양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스리랑카인 K 씨(46)를 구속 기소하고 공범 2명은 기소 중지했다. 15년 동안 삭힌 유족의 한을 풀어주는 순간이었다.
이밖에도 이번에 선정된 우수 과학수사 사례 중에는 정밀한 문서감정을 통해 위조 서명을 알아낸 사례, 휴대폰 모바일 분석을 통해 보험사기 및 간통사건을 알아낸 사례, 최초로 국제 스미싱 일당을 검거한 사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수사 기법을 활용한 사례들이 선정됐다. 김영대 대검 과학수사기획관은 “IT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과학수사의 중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다”며 “진화하는 범죄 수법에 대응하기 위해 앞으로 신기술 개발과 연구 개발에 더욱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