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억 원을 횡령한 은행원 김 아무개 씨가 공소시효 1년여를 앞두고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영화 <산전수전>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그런데 김 씨의 모습을 본 경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배전단에 오른 김 씨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완산경찰서 김해종 경제팀장은 “김 씨를 봤을 땐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외적인 변화가 컸다. 아무래도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너무 마른 탓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씨의 8년 도피생활은 궁핍 그 자체였다. 2005년 자체감사를 통해 횡령사실이 밝혀지자 김 씨는 곧장 전주를 떠났다. 한순간의 실수로 남편과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고통을 겪어야했을 뿐만 아니라 김 씨의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어 팍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배자 신분으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어 가족이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지내는 게 전부였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사건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힐 때쯤 가끔 전주로 찾아와 가족들을 만나는 게 김 씨의 유일한 낙이었다. 최근에는 자신의 주소지인 전북 완산구 효자동 인근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간 큰’ 행동도 보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격적인 반전은 김 씨의 초라한 행색만이 아니었다. 거액의 횡령범을 검거했음에도 이상하게 이를 반겨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흘러 사건 자체를 기억하는 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라 말할 수 있는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직후 하나은행은 사태 수습을 위해 피해를 입은 고객들에게 자체적인 배상을 끝냈으며 은행으로서도 자사의 직원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또 다시 주목받는 것을 꺼리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김 씨 역시 모든 배상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의 김해종 경제팀장은 “김 씨가 5년 동안 고객의 돈을 인출해 사용함에 있어서 상급자의 결재 없이 이뤄졌던 것은 분명 관리 시스템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객의 돈을 직원의 양심에만 맡겨놓는 꼴”이라며 “김 씨의 검거에도 쉬쉬하는 분위기만 조성될 뿐 개선을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아 아쉽다. 더 이상 이러한 사건이 발생되지 않도록 시스템 개선 및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국민은행의 거액 직원 횡령 사건이 터지는 와중에 은행의 이런 쉬쉬 하는 분위기는 제2의 범행을 조장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전주=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은행권 금융사고 5년 동안 3626억
내부직원에 의한 횡령, 배임, 사기 및 도난 등 은행권 금융사고 매년 끊이질 않고 있다. 실제 최근 5년간 은행권에서 발생한 금융사고만도 총 297건에 달하며 피해 규모는 3626억 원에 이른다. 수백억 원에 이르는 대형 불법대출사건이 상당수 포함돼 있지만 ‘전주 50억 횡령사건’처럼 직원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객의 돈에 손을 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주 사건의 경우 피의자 김 아무개 씨(여·40)는 예금업무를 맡고 있어 고객의 계좌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고객의 돈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상급자 보고 없이 송금이나 출금을 할 수 있어 덕분에 하루에 700만 원에서 많게는 2억 2000만 원까지 빼내도 주변에서 눈치 채는 사람이 없었다. 간혹 돈을 손댄 고객이 방문해도 다른 계좌에서 돈을 빼내 위기를 모면하면 그만이었다.
190억 원대의 공금을 빼돌린 사량수협의 안 아무개 씨(40)도 무려 5년 동안 범행을 이어갔다. 마른멸치 구매사업 업무를 맡았던 안 씨는 허위 주문으로 돈을 빼내 이중 100억 원은 수익금 명목으로 수협에 다시 입금했으나 나머지 돈은 사채 빚을 갚거나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6채의 아파트, 고가의 명품시계,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가하면 40억 원에 달하는 사채 빚도 공금으로 갚았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5월에서야 안 씨가 외국연수로 자리를 비운 사이 미수금 내역을 정산하는 과정에서 들통 났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국민은행에서 발생한 국민주택채권 위조 및 횡령 규모도 100억 원을 넘을 전망이라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긴 고객들의 불안감만 날로 높아 가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