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열린 ‘글로벌 R&D 포럼’ 개회식에 앞서 황창규 R&D 전략기획단장이 블로마우스를 연결한 장애인용 갤럭시탭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 소환된 이 전 회장보다 더 주목받는 사람은 KT의 새로운 수장으로 떠오른 황창규 내정자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KT가 계속 흔들려왔던 데다 이 전 회장 역시 전임 CEO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면서 KT의 차기 CEO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정치권 입김이 배제된 인물이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던 탓이다. 그런 차원에서 일단 황 내정자는 비교적 ‘괜찮은 선임’이라는 평이 적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두어 달 지켜봐야겠지만 정치색이 짙은 사람이 선임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평했다. 황 내정자가 KT 차기 CEO 최종 후보로 낙점되자마자 ‘KT 황창규 후보자, 삼성전자와의 독립적인 관계 유지해야’라는 논평을 통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경제개혁연대도 정치색에 대해서는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채이배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이런저런 설이 나오고는 있지만 정확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면서 “아직 정치적으로 명확한 줄이 드러난 것은 없지만 실증적인 게 나온다면 강력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황 내정자는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 지식경제부 R&D(연구·개발)전략기획단장을 거친 반도체 전문가다. 256메가 D램 최초 개발, ‘황의 법칙’ 등은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 뒤에 늘 따라다닌다. 황 내정자는 삼성전자 사장 시절 글로벌 업체들과 경쟁해 살아남고, 1등이 되기 위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뛰어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뿐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각오를 다질 것을 주문했는데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삼성전자 반도체 수장 시절 황 내정자는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갖춰달라며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를 기억하고 있는 재계 인사는 “당시 삼성전자의 반도체부문은 해외 경쟁사들을 따라잡아야 하는 처지였고, 반도체 산업 속성상 언제 어떻게 뒤집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터라 늘 긴장하고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전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은 이순신 장군의 말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의미다. 황 내정자는 삼성전자 사장 시절 이순신 장군에 심취,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본인은 물론 임직원들을 독려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이 위기에 빠져 있는 KT를 구해낼 적임자로 통했다는 것이 KT 이사회 측 얘기다. KT 측은 “현재 KT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 KT의 경영을 본 궤도에 올려놓는 데 기여하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회사의 가치를 크게 높일 것”이라며 황 내정자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황 내정자는 미래전략 수립, 혁신, 도전정신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달리 해석하면 성과 제일주의, 실적 지상주의로 나타나 임직원들을 무섭게 몰아붙일 수 있는 단점으로 작용할 공산이 적지 않다. 황 내정자를 잘 아는 한 재계 관계자는 “실제로 삼성전자 사장 시절 늘 전투태세를 다져 힘들어하는 임직원이 적지 않았다”며 “회장 취임 이후 KT 임직원들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 황 내정자의 회장 취임 이후 KT에 고강도 구조조정 바람이 몰아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이석채 전 회장 시절 영입됐던 인사들 중 일부는 ‘살 길 찾기’에 분주하다는 소문도 들린다.
황창규 KT 회장 내정자가 지난 18일 KT사옥에 들러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이라는 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KT와 삼성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황 내정자의 등극으로 KT와 삼성전자의 관계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18일 논평을 통해 “기간통신사인 KT와 글로벌 단말기 제조사로 발돋움한 삼성전자가 유착된다면, 이는 관련 산업분야의 건강한 생태계에 치명적 악영향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이배 연구위원은 “둘의 관계로 관련 산업 지형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라며 “황 내정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황창규 내정자가 KT의 CEO추천위원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최종 내정자로 낙점됐지만 KT 밖에서는 전적으로 환대받지는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황 내정자 역시 정치권과 아예 관련이 없지 않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벌써 여권 실세와 연결돼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1953년 부산에서 출생해 부산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황 내정자는 줄곧 삼성전자에 몸담고 있었던 터라 정치권 인맥이 넓지는 않다. 그러나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 시절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던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는 같은 PK(부산·경남) 출신을 인연으로 ‘친분설’이 돌고 있다. 비록 정치권 인맥의 폭은 좁지만 현 정권 최고 실세들이라 할 수 있는 김기춘 비서실장과 최경환 원내대표와의 친분설에 황 내정자의 KT행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시각은 형태근 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과도 연결돼 있다. 최 원내대표와 형 전 위원이 대구고 동문에다 행정고시 22회 동기로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형 전 위원은 KT 차기 CEO 공모 당시 황 내정자와 함께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수장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형 전 위원은 공석인 KT 부회장직에 내정됐다는 얘기가 돌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형 전 위원은 이석채 전 회장 시절에도 부회장 영입설과 KT 인사 관여설이 돌았다. 만일 형 전 위원이 세간의 이야기처럼 KT 부회장으로 입성한다면 논란이 일 공산이 크다.
KT 회장 자리는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다. ‘통신 문외한’이라는 지적을 떨치기 위해 ‘열공’ 중이라는 황창규 내정자에 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쏠려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음악 전공 아내보다 더 클래식 음악에 ‘빠삭’
황창규 KT 회장 내정자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공대생’에다 이순신 장군의 ‘필생즉사 필사즉생’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비즈니스에서는 승부사로 통한다. 그런 그는 음악 미술 등 예술에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 내정자를 아는 사람이면 대부분 “클래식 애호가”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오죽하면 “음악에 관한 한 연세대 음대를 졸업한 부인보다 더 많이 알 정도”라는 말까지 들린다. 한 재계 인사는 “삼성전자 재직 시절 황 내정자는 해외 출장을 가면 꼭 클래식 공연을 보고 왔다”고 전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씨와 친분이 깊어 수시로 안부를 주고받는 관계라고 한다.
미술 분야 지식도 꽤 많은데 이는 조부의 영향이 큰 듯하다. 황 내정자의 조부는 구한말 사군자 중 매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화원화가 황매산 선생이다. 스포츠 쪽으로는 테니스와 골프가 수준급이라고 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