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우울증을 앓다 자살한 공무원에 대해 사법사상 처음으로 ‘심리적 부검’을 실시하고 공무상 재해로 인정해 화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일요신문 DB
김 씨의 부인은 2010년 4월 김 씨의 유서를 근거로 공무원연금공단에 유족보상금을 청구했으나 거절당했고 2011년 1월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업무과다가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라며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판결을 뒤집었다. 김 씨의 심리부검을 통해 우울증의 이유가 업무 스트레스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심리부검에는 김 씨의 유서 외에도 방대한 양의 자료가 필요했다. 재판부는 사법사상 최초로 실시된 이 사건의 심리부검을 1000건 이상 자살 사례를 연구한 민성호 연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감정을 맡겼다.
심리부검을 맡은 민 교수는 3일간 김 씨의 부인과 자녀들, 직장 동료 7명을 만나 심층 면담을 시작했다. 또 김 씨가 남긴 유서, 일기장, 메모 등의 모든 자료를 수렴했다. 김 씨의 허리 사이즈가 3개월간 34인치에서 31인치로 줄어든 것도 민 교수는 놓치지 않았다. 고인의 무의식까지도 분석하는 심리부검은 이처럼 방대한 자료와 분석을 필요로 했다.
민 교수는 “처음 감정을 의뢰받았을 때 재판은 이해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공무원은 세금으로 보상이 되고 세금이 헛되이 쓰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좀 더 객관적으로 하려고 노력을 했다”며 “이번 감정은 경찰부터 조사했던 양도 일반적 조사보다 많았다. 일단 객관적인 자료들을 분석했고 지인들의 면담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2013년 여름 내내 자료를 분석한 민 교수는 “김 씨가 과다한 업무량에도 승진을 위해 삶의 상당 부분을 업무에 투자했는데 승진이 좌절돼 상실감을 느꼈고, 조직개편으로 인한 업무 증가에 따른 혼란상태, 그 과정에서 우울장애가 발병해 자살했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는 “김 씨가 정상적인 근무시간보다 40%가량 초과근무를 하면서 많은 업무량을 처리했고, 업무량이 더욱 많아졌음에도 충원돼야 할 직원이 충원되지 않아 부하 직원이 해야 할 업무까지 처리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김 씨의 사망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마포대교에 이어 투신자살 발생 건수가 두 번째로 많은 한강대교가 ‘생명의 다리’로 탈바꿈했다. 핀란드 등에선 심리부검을 적극 도입해 자살률을 절반 가까이 줄였다. 구윤성 기자
보건복지부와 자살예방을 위한 심리부검을 진행했던 경기도정신건강증진센터의 김현수 센터장은 “사건자체에 집중하는 경찰조사와 달리 심리부검은 자살에 이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추정한다”며 “심리부검은 자살자의 주변인을 통해 성장과정부터 최근 경제적 요인까지 조사한다. 면담의 경우 1명당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심리부검이 자살자에 대한 심층적인 사인분석이나 자살예방에 대한 데이터 확보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한국에서 심리부검에 대한 수요나 정책은 제자리걸음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인력과 예산의 문제다. 한국에서도 2008년 보건복지부가 자살예방 종합대책의 하나로 심리부검을 도입했지만 미미한 활동에 그쳤고, 핀란드나 미국처럼 정부가 주도해 제도를 운영한 사례가 없다.
일각에서는 심리부검에 대한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심리부검을 하는 것에 대한 정확성과 유교문화권에서 고인을 욕되게 하는 발언을 하겠느냐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국방부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 지정우 박사는 “심리부검의 경우 개인의 일기나 수첩부터 정신과 진료기록, 과거자살시도 경험까지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해 분석한다”며 “심리부검은 1명당 일반적으로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객관성 확보를 위해 고인과 친했던 사람은 물론 적대적인 사람까지 인터뷰 대상이 된다”고 설명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유가족 참여율 10% 불과
그러나 한국에서 심리부검은 좀처럼 유족의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망자에게 누가 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풍토 때문에 서양에 비해 심리부검에 응하는 사람이 적다. 또 심리부검에 응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드러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자살을 창피하거나 감춰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편견도 걸림돌이다. 심리부검에서 가장 중요한 면담 과정에서 면담자들이 자살한 망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면서 자살예방을 위한 심리부검이 외면 받으면서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김현수 센터장은 “심리부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유족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며 “경험이나 통계상 큰 슬픔이 지나는 3개월부터 고인에 대한 기억이 비교적 정확하게 남아있는 3년 안에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49재나 3년상 같이 고인을 기리는 장례문화가 3년에 걸쳐져 있어 문화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유교 문화권인 중국, 일본도 심리부검이 자리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심리적 부검은 대개 고인의 의료기록, 재산 상황, 인터넷에 쓴 글, 휴대폰 메시지 등의 흔적과 주변인의 입을 통해 고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선 경찰이나 지역 자살예방센터 등을 통해 심리적 부검 대상자를 선정하고 유가족의 연락처를 확보하면, 경찰의 협력을 얻어 자살을 전후한 사실관계 등을 확인한 다음 자료 수집의 절차를 거친다.
유가족 등 고인과 가까운 이들과의 면담은 심리적 부검의 핵심 절차다. 면담 내용은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학력부터 병력까지 고인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한다.
심리부검 연구자들은 3개월 이상의 애도기간을 두고 유가족과 접촉한다. 면담 안내문에는 ‘말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기록은 비밀 유지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등의 내용이 포함 돼있다. 부검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유족 돌보기 프로그램’이나 ‘유족 애도 상담’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핀란드의 경우 83%에 달했던 유족참여율이 한국의 경우 10명 중 1~2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심리부검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유족들에게도 정신적 치료효과가 있어 조금씩 심리부검에 참여하는 유족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정우 박사는 “심리부검은 정보를 빼내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하는 상담자의 역할도 한다. 최근에는 심리부검에 응하는 유족들도 많다”며 “간혹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자료 때문에 유가족이 심리부검을 반대하는 이유도 있지만 결국 접근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족들의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숨기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유가족에게 접근할 때는 슬픔에 대한 동질감과 안타까움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심리부검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핀란드 자살률 국가개입 후 절반 ‘뚝’
대공황이 지나간 1934년에서 1940년의 미국 뉴욕에서 경찰 93명이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례없는 경찰들의 자살행렬을 조사하기 위해 뉴욕에는 전문가 위원회가 구성됐고 이후 워싱턴 대학과 연계한 체계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현대적 의미의 심리부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자살 유가족에 대한 심층 면담이 이루어졌고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집단에 대한 심리부검이 실시되면서 연구 결과가 자살예방에 활용됐다.
심리부검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나라는 한때 ‘자살의 수도’로 불렸던 핀란드다. 1990년대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던 핀란드는 심리부검을 실시하면서 자살률을 절반 가까이 줄였다.
핀란드는 자국민의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1986년부터 5년 동안 전문가 6만 명을 동원해 1987년에 자살한 1397명에 대한 심리부검을 실시했다. 당시 5년간 투입된 예산만 해도 300억 원에 이른다. 심리부검과 관련한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이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기도정신건강증진센터 김현수 센터장은 “한국의 경우 2013년 심리부검과 관련한 예산이 1억 원 수준이었다”며 “효과적인 자살예방정책을 위해서는 자살자의 10%, 한국의 경우 1400여 건의 심리부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2008년 보건복지부가 심리부검을 도입하면서 확보한 데이터는 1년 10건 미만에 불과했다. 망자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장례문화도 변수가 됐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핀란드의 경우 자살자의 심리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자살 예방정책을 세웠고, 1991년부터 국가적으로 자살 예방사업을 실시했다. 핀란드의 국민은 병원에 가면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여부를 주기적으로 체크할 수 있었고, 그와 관련한 기록체계도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또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된 환자는 상담과 약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핀란드의 자살률은 지난 2012년 인구 10만 명당 17.3명으로 낮아졌다. 심리부검을 시행한 지 23년 만에 자살률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국내에서도 심리부검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3년 11월 새누리당 가족행복특별위원회는 구체적 자살 원인 파악을 위해 심리부검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2014년도에 관련 예산을 당 차원에서 적극 추진하기로 발표했다.
군대 내 의문사를 규명하는 데도 심리부검이 활용되고 있다. 군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 참여했던 이영문 전 아주대의료원 정신건강연구소 소장은 “2009년도 군대 내 의문사 120여 건 중 자살로 판명된 60건에 대해 심리부검을 실시함으로써 원인 규명이 상당히 이뤄지고, 이를 통해 예방대책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국방부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 지정우 박사는 “심리부검 자료가 증거로 채택이 된 이번 법원의 판결은 고무적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해서 심리부검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수요에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