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 계열사 수는 지난 2004년 22개에서 2013년 말 25개로 겨우 3개가 늘었을 뿐인데, 자산은 같은 기간 9조 1790억 원에서 29조 4250억 원으로 220%나 증가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비(OB)맥주를 앞세운 내수 위주의 기업이었으나, 이제는 대표적인 중공업 중심 그룹으로 성장했다. 두산은 “내가 팔기 아까운 것을 내줘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M&A 철학’에 따라 OB맥주 등을 팔고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등을 손에 넣어 기계 제조 등 중공업 위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지난 8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 지각변동의 가장 큰 진앙은 ‘어닝쇼크’를 낳은 삼성전자가 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연 매출 228조 4200억 원, 영업이익 36조 7700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에도 불구하고 4분기에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전 사업부문의 실적이 감소했다. 올해 시장 전망을 놓고 보면 그동안 구가해온 초고속 성장이 한계점에 다다랐고, 정보통신과 모바일부문에 편중돼 있는 성장전략을 바꾸려면 새로운 성장부문을 찾아 대형 M&A를 추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0년 태양전지, 자동차용전지, 발광다이오드(LED), 의료기기, 바이오, 이렇게 5개 부문을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해 역점을 둬왔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직 사업 진척도가 실적을 평가할 만큼 무르익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대형 M&A 전략에서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4대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전체 그룹 차원에서 신성장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며 “삼성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M&A 시장에 공격적으로 뛰어들 것이란 예측이 많다”고 전했다.
현재 M&A 시장에는 삼성뿐만 아니라 자금 여력이 있는 대기업들이 입맛을 다시게 할 매물들이 줄줄이 나와 있다. 지난해 장기 불황으로 STX, 동양, 현대, 동부그룹 등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주력 계열사들을 시장에 내놨다. 올해 상반기에만 M&A 시장 규모가 수십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동부그룹에선 동부하이텍, 동부메탈, 동부제철 인천공장 및 당진항만 등이 매물로 내놨다. 대략 자산규모가 3조 원에 이른다. 반도체 전문회사인 동부하이텍의 매각 대상 지분은 37%로 1000억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시장에서는 동부하이텍의 성장 가능성이 높아 조기 매각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그룹의 금융 계열사 3곳(현대증권, 현대자산운용, 현대저축은행)도 매물로 나와 있다. 이는 증권·금융사들의 M&A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동양그룹의 동양증권에 이어 이트레이드증권, 아이엠투자증권, 리딩투자증권, 애플투자증권 등 10여 증권사가 매물로 나온 상태다. LIG그룹은 LIG손해보험 매각을 추진 중이다. 건설업계 불황으로 쌍용건설, 남광토건, 동양건설산업, LIG건설 등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삼성·현대차·SK·LG, 4대 그룹이나 여타 대기업들이 이들 매물 중에 덩치가 큰 기업들을 손에 넣을 경우 재계 판도는 재편될 수 있다.
사실 M&A로 인한 재계의 지각변동은 이미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산 기준 10대 민간기업집단에서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포스코로 이어진 서열 1∼6위의 구도는 변화가 없지만 그 아래로는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변동성이 큰 상황이다. 지난 연말 GS그룹이 STX에너지에 대한 인수계약을 체결한 만큼 실제 지분인수가 마무리되고 나면 현재 7위인 현대중공업그룹을 8위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전망이다.
재계 서열 9위인 한진그룹은 올해 한진에너지가 보유한 S-oil(에쓰오일) 지분 등을 매각하고 나면 3조 9000억 원가량 자산이 줄어들어 서열이 11위로 떨어지게 된다. 9위 자리는 11위였던 KT가 차지할 전망이다. 10위는 한화그룹이 유지하고 있다. 서열 11위 밑으로는 두산, CJ, 신세계, LS 등의 순이다. 서열 17위인 동부그룹은 계열사 매각이 계획대로 이뤄지면 20위로 내려앉게 된다. 현대그룹도 현대증권 등 4조 원 이상의 자산 매각이 이뤄지면 기존 21위에서 25위로 4계단 하락이 예상된다.
물론 시장에선 M&A 경쟁에서 이겼지만 과도한 비용으로 인수 후 후유증을 겪는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나 재편을 단행했다가 업황 부진이나 자금경색으로 부메랑을 맞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올해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아 거액을 들여 섣부른 투자전략을 추진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SK그룹의 최태원, 한화그룹 김승연, CJ 이재현 등 주요 그룹 회장들의 부재도 M&A 시장의 위축을 우려하는 요인 중에 하나다. 그러나 또 다른 대기업의 관계자는 “기업의 투자판단은 불확실성이 높을 때 이뤄진다”면서 “올해가 그러한 역동적인 시장 흐름이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