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청자 등 도자기 4점을 가로챈 골동품 사기사건이 벌어져 인사동 업계가 패닉에 빠졌다. 위 사진은 골동품 가게 CCTV에 찍힌 주범 ‘가짜’ 송 회장과 민 씨.
송 회장을 사칭한 박 씨 일당의 사기극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해자 정 씨는 고미술품을 찾는 고객과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동생 민 씨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변변한 직업조차 없었던 민 씨는 어느새 인사동 인근 큰 식당 3곳에 투자까지 하는 재력가가 돼 있었다. 민 씨는 정 씨를 비롯해 인사동 일대 고미술품 상인들과 교류를 하며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언변이 화려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민 씨는 금세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피해당한 가게 주인.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피해자 정 씨는 “민 씨가 소개해준 송 회장은 인사동 고미술품 업자들에게 역삼동 소재의 공시지가 180억 원 상당의 건물과 대지를 가지고 있다는 공증받은 서류를 보여줬다. 실제로 몇몇 업자들은 역삼동으로 가서 건물주를 확인하기도 했다. 틀림없는 송 회장의 소유였다”며 “이후 송 회장을 소개시켜 준 민 씨는 고미술품계의 떠오르는 샛별 혹은 다크호스로 통했다. 10원짜리 대출하나 없는 깨끗한 땅을 250억 상당의 고미술품과 바꾼다고 하니 고미술업계 원로들까지 현혹됐다. 다들 민 씨를 잡으면 살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혈안이 돼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천 아무개 씨는 “사업장으로 민 씨와 송 회장이 찾아와 가끔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눴다. 직접 송 회장의 건물로 가서 건물주를 확인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기에 송 회장은 상인들 사이에서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으로 통했다”며 “송 회장이 미국에 있는 자신의 내연녀로부터 얻은 11살가량의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하는데 땅을 물려주면 상속세 문제도 있고 해서 골동품을 사서 주려고 한다고 말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1년간 고급승용차와 재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여 온 가짜 송 회장 박 씨와 그의 공범 민 씨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민 씨는 시가 5억 원 상당의 조선시대 달 항아리를 보유하고 있는 정 씨에게 접근해 구입의사를 밝혔다. 얼마 후에는 민 씨가 송 회장의 심부름으로 왔다며 정 씨가 보유하고 있던 감정가 15억 원 상당의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도 미리 가져가겠다고 했다. 정 씨는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동행 하에 송 회장의 자택까지 운반하겠다고 했지만 민 씨는 “송 회장은 외부인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며 극구 반대했다. 피해자 정 씨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에게는 관례상 확인증과 보관증을 받고 돈을 받기 전 물건을 건넨다. 상대방이 감정을 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며 “LH공사 주택지구로 지정된 군포의 땅이 팔리면 대금지불을 하겠다고 해 그때까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15억대 고려청자 진사화병 인증서. 아래는 피해당한 가게 내부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렇게 도난당한 도자기 4점은 인사동의 고미술품 업계 사정을 잘 아는 또 다른 공범인 장물 브로커 김 아무개 씨에게 넘겨졌다. 김 씨는 이 도자기 4점을 3명의 장물업자에게 맡기고 억대의 돈을 대출 받았다.
결국 물건 대금을 지급하기로 한 기일을 3번이나 넘긴 송 회장은 자취를 감췄다. 송 회장을 사칭한 박 씨는 마지막 통화에서 “대한민국에 내 신원 아는 사람 얼마 없다. 나 잠수타면 그만이다. 나 못 잡을 거다”라고 말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계속되는 위치추적과 피해자들의 협조로 가짜 송 회장 박 씨는 지난 4일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 조사 결과 범행을 주도한 박 씨는 실제 부동산 재력가 송 아무개 씨의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범행에 사용해온 상습토지사기범으로 드러났다. 이때 사용된 위조금액 100만 원은 민 씨가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일당은 도자기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사설경마, 유흥비 등으로 탕진했다.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장물업자들로부터 회수한 도자기 3점은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문화재청의 협조아래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의뢰했다”며 “나머지 1점의 행방을 확인 중이며, 추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실제 인물 송 회장은 자신의 신원을 도용해 벌어진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15억짜리 국보급 청자는 행방 묘연
달항아리
이번에 발생한 ‘인사동 고미술품 사기 사건’은 오랜 불경기를 겪고 있는 상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장물브로커가 개입돼 있어 그 피해가 더 컸다.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는 장물 브로커 김 씨의 경우 누가 어떤 물건을 들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고미술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짜 송 회장 박 씨와 공범 민 씨가 억대의 청화백자 2점과 달 항아리 1점,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 1점 등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김 씨의 정보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천 씨가 보유하고 있던 청화백자는 각각 시가 1억 원과 2억 원에 거래되던 작품이었다.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백자항아리의 한 종류로 푸른색의 청화 안료로 그린 문양들이 특징이다. 천 씨의 청화백자는 장물업자 정 아무개 씨에게 흘러들어갔다 현재 2점 다 회수된 상태다.
정 씨가 보유하고 있던 조선시대 달 항아리 1점과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 1점의 시가는 각각 5억 원과 15억 원에 이른다. 특히 달 항아리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이 달 항아리는 장물업자 임 아무개 씨에게 흘러들어갔으나 임 씨가 포기각서를 쓰면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가장 고가인 고려청자 진사화병은 주인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진사’는 청자에 새겨진 붉은 문양을 뜻하는 것으로 청자 1000개 중 1개에서만 ‘진사’ 문양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도자기다. 이 고려청자 진사 화병은 인천의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 김 아무개 씨에게 흘러들어간 이후 처분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 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