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24일 서울의 한 쪽방동네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한 집의 세간살이를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 관련 비리의혹 사건을 전담할 특별검사보 3명을 임명·내정한 12월 29일, 안대희 중수부장은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 7층 자신의 집무실에서 빼곡히 들어선 40여 명의 취재진에게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안 부장은 지난 10월 초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소환통보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 3개월간의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측근들의 불법 대선자금 모금에 부분적으로 연루된 정황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동안 ‘의혹’ 또는 ‘설’ 수준에 머물렀던 노 대통령의 측근 비리 연루 사실이 수사기관을 통해 공식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검찰은 이날 대통령의 오른팔, 왼팔로 불리던 안희정씨(38·구속)와 이광재씨(38),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51·구속)을 비롯한 측근 비리 사건 연루자 8명을 구속 및 불구속 기소하면서, 이들의 비리 혐의와 함께 노 대통령이 연루된 사례 몇 가지를 공개했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직전 이광재씨 등이 썬앤문그룹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던 현장에 동석했고 ▲개인후원회장인 이기명씨의 용인 땅 매매 형식을 빌어 자신이 관여된 샘물회사 장수천의 채무변제가 이뤄진다는 것을 사전에 보고받았으며 ▲장수천 대표 선봉술씨가 채무변제와 관련해 입은 손실을 선거자금으로 보전해주도록 최도술씨 등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우선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9일 서울 강남의 R호텔 일식당에서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썬앤문그룹 문병욱 회장(구속)으로부터 1억원을 받을 당시 그 자리에 동석해 아침 식사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자리는 노 대통령의 고교후배인 K은행 간부 김아무개씨가 대선자금이 필요했던 이광재씨와 노캠프측에 줄을 대려던 문 회장을 연결해 마련된 것으로, 식당 예약 및 음식값 지불은 현재 청와대 제1부속실 국장인 여택수씨 명의로 이뤄졌다.
검찰은 “당시 노 후보가 먼저 자리를 뜬 뒤 문 회장이 이씨에게 1천만원짜리 수표 10장을 건네 노 후보는 돈 수수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진술”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12월6일 문 회장이 부산지역 유세중이던 자신을 찾아와 인사한 뒤 수행비서 여택수씨에게 3천만원이 든 쇼핑백을 전달할 때도 지근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사실상 노 후보에게 돈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는 대목이다. 게다가 이 돈은 나중에 민주당 선대본부측에 넘어갔으나 영수증 처리가 안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검찰은 노 대통령이 썬앤문그룹의 감세청탁을 받고 손영래 당시 국세청장에게 감세 지시를 했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 결론은 유보했다.
김성래 전 썬앤문 부회장은 “노 대통령이 손 전 청장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들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으나, 당시 국세청장 비서실 직원과 손 전 청장 등은 김씨의 주장을 부인하고 있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썬앤문 로비자금 중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서울지방국세청 홍아무개 전 과장의 메모에서 ‘71억원’이라는 숫자 밑에 한글로 ‘노’라는 표기가 돼 있는 것을 근거로 노 대통령 관련 사실을 적은 것이 아니냐고 홍씨를 추궁했으나, 그는 “영어로 부정의 뜻인 ‘NO’를 한글로 적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노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경영에 관여하기도 했던 장수천이 한국리스여신에 지고 있던 34억여원의 빚 가운데 형 노건평씨 등 소유의 경남 진영읍 땅과 상가 경매 등을 통해 갚고 남은 18억8천5백만원을 강금원씨가 이기명씨의 경기도 용인 땅을 사는 형식으로 19억원을 제공해 전부 변제된 과정을 미리 보고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안 중수부장은 “소유권 이전도 안 된 상태에서 매매대금 전액이 지급된 정황 등으로 볼 때 강금원씨가 용인 땅을 매입하는 형식으로 (노 후보측에) 제공한 19억원은 사실상 무상대여한 것이고, 이는 정치자금법 위반 행위”라고 규정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지난해 5~7월 최도술씨와 안희정씨한테 “장수천 빚 보증을 섰다가 재산 피해를 입은 선봉술씨 등의 손실을 보전해주라”고 지시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에 최씨는 SK 등으로부터 받은 돈 7억5천만원을 선씨에게 줬고, 안씨도 기업들로부터 받은 돈 중 7억9천만원을 선씨에게 제공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장수천 채무변제에 따른 궁극적인 수혜자는 노 대통령임을 부인하지 않는 분위기다. 특히 이 과정에서 최씨가 선씨에게 준 7억5천만원 중에는 2000년 지방선거 당시 부산지역선거대책본부가 쓰고 남긴 선거잔금 2억5천만원도 포함됐는데, 노 대통령은 최씨에게 “선거잔금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발표 내용대로라면, 노 대통령은 정치자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측근들과 공범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서초동의 Y변호사는 “만약 노 대통령이 이광재씨 등의 썬앤문 돈 수수 사실을 사전 인지하고 있었거나 묵인했다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장수천 채무변제와 관련해서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와 함께 최도술씨와 공모해 선거잔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의 경우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도록 돼 있는 헌법 84조에 따라 범죄 혐의가 불거져도 처벌대상에서 제외된다.
안 중수부장이 “노 대통령의 연루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갖고 있으나 헌법의 정신과 취지를 감안해 공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밝힌 것도 헌법 조항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안 부장은 “대통령 직무수행의 안정성 문제와 다른 관련자 조사를 통해 진상규명이 가능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대통령을 지금 조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따라서 노 대통령에 대한 직접 조사 여부는 내년 1월7일부터 공식 활동에 들어가는 김진흥 특검팀이 떠안아야 할 ‘뜨거운 감자’로 남게 됐다.
김 특검팀 역시 검찰 못지않게 현직 대통령을 조사하는 데 대한 부담이 적지 않겠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노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청와대측도 검찰 수사발표 직후 “노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든 수사를 회피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안정적인 국정수행을 하기 위해서라도 특검팀이 이번 기회에 남은 의혹을 말끔히 털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노 대통령이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직 시절 성추문과 관련해 특별검사의 신문사항에 대한 진술장면을 백악관에서 영상으로 녹화해 특검팀에 전달한 전례를 본따 ‘영상 조사’를 받는 방안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물론 서면이나 전화를 이용한 조사 방안도 있다. 또 특유의 돌파력을 지닌 노 대통령의 스타일상 특검팀에 전격적으로 자진 출두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렇게 노 대통령의 측근 비리가 국가 수사기관인 검찰에 의해 공식 ‘확인’되면서 정치권에도 커다란 파장이 일고 있다. 먼저 노 대통령의 인기가 이번 측근 비리 수사로 더욱 추락해 국정 운영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록 청와대가 검찰 발표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의혹 쟁점을 부인하고 있지만 노 대통령의 도덕성은 이미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이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까지 30%대의 저조한 지지율에 허덕여 왔는데 이번 파문으로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총선을 불과 1백여 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권으로서는 지지율 하락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향후 대선자금 수사에도 핵폭풍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은 특검을 의식해 임명권자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메스를 들이댔다. 청와대가 부랴부랴 검찰의 혐의 내용을 부인할 정도로 이번 수사 결과는 노 대통령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이렇듯 검찰이 ‘열외 없는 수사’를 외친 이상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도 또 한 차례 ‘파란’이 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정가 일각에서는 “검찰이 대통령에게 생채기를 입히면서까지 측근 비리를 털었는데 야당이나 기업의 불법자금에 대해서는 오죽하겠느냐”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검찰이 얼마 전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장기화 전망을 밝힌 것도 저인망식 먼지털이 수사를 이미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 경우 아직 혐의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30대 기업과 일부 공기업 등에 대한 수사를 통해 정치권이 또 한 번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도 크다.
마지막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승부사’ 노 대통령의 특단조치다. 여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총체적 위기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또 다른 히든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재신임 발언을 통해 사면초가에 빠진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일거에 반전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묘수가 담긴 ‘극약처방’을 통해 국면 반전을 모색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노 대통령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재신임을 꼭 관철시킬 것이라고 밝힌 바 있고 청와대 주변 관계자들도 대통령의 ‘의지’가 아직까지 유효한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선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하거나 야당이 요구하는 개헌과 재신임을 연계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위기’에 놓인 노 대통령의 마지막 카드가 과연 무엇일지, 또 그 카드를 통해 ‘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진기 언론인·성기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