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오석 경제부총리(왼쪽)와 김중수 한은 총재는 기준금리 인하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보여왔다. 따라서 후임 총재는 정부와의 정책공조 ‘코드’가 맞는 인사여야 한다는 게 청와대의 시각이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조찬회동 모습. 연합뉴스
한은은 한국 경제 최후의 보루다. 발권력과 금리를 통해 물가 등 경제흐름을 조율한다. 지금과 같은 한은의 위상이 틀을 갖춘 것은 지난 1997년 한국은행법이 전면 개정되면서다. 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직이 재정경제부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뀌었다. 적어도 제도상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오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비상근직이었던 금융통화위원들도 상근직으로 바뀌어 책임성이 강화됐다.
이후 한은의 독립성은 확보됐지만 대신 정부와의 정책공조가 줄곧 문제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기준금리 인하를 둘러싸고 벌어진 김 총재와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시각차와 갈등은 국내 경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시장에서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빌미를 제공했다. 경기회복을 급선무로 판단하는 정부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선제적 방어가 주 임무인 한은의 입장은 같은 쪽보다는 다른 쪽을 향해 가기 십상인 것이다.
이에 따라 후임 한은 총재는 정부와의 정책공조에서 ‘코드’가 맞는 인사여야 한다는 게 청와대나 재정부 주변의 시각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현 부총리가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던 시절에도 물가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김 총재를 공격했었는데, 그 악연이 이어져 시장에는 자주 혼란이 일었다”면서 “정부 쪽에선 당연히 마찰을 일으킬 껄끄러운 관계보다 매끄러운 관계가 형성될 만한 인물을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보군은 아직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지난 10일 미국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차기 한은 총재 관련 질문에 “지금 어떤 분이 좋을까 널리 생각하고 찾는 중이어서 특별히 어떤 분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신중한 답변이지만, 적임자 물색작업에 그 만큼 공을 들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밑 후보군은 10명이 넘는다. 학계에선 박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로 불리는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 박 대통령의 경제공부 멤버인 김인준 서울대 교수와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국민정책자문회의 위원인 정갑영 연세대 총장과 조윤제 서강대 교수, 이덕훈 키스톤프라이빗에쿼티 대표 등이 거론되고 있다. 관계에선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유장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김준경 KDI 원장 등의 이름도 나온다.
이들 중 가장 왕성하게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은 김광두 교수다. 그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당내 경선 때부터 박 대통령의 경제 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난 2010년 국가미래연구원을 설립했다. 김 교수는 인터뷰를 통해 “국가미래연구원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지난해 3월 독립선언을 했다”며 “이제는 어떤 권력과도 상관없는 민간 싱크탱크”라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의 표면적인 기대와 달리 박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 과정에서 일등공신으로 분류되는 그는 차기 개각에서도 입각 영순위라는 관측이 파다하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새누리당 내에선 김 교수가 국가미래연구원 출신들을 정부 산하단체 등에 촘촘하게 심어놓는 바람에 당내 친박들이 갈 곳이 없다는 불평이 나돈 지 한참됐다”면서 “개각뿐만 아니라, 한은 총재 인선에도 그의 의견이 전달되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으로 알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 교수와 오래 알고 지낸 여권 인사는 최근 몇몇 기자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김 교수가 정부 출범 1년간 야인처럼 지냈는데, 이제는 한은 총재 정도의 역할을 맡아도 될 때가 됐지 않느냐”며 “김 교수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총대를 멜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교수가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 그룹이 집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엔 그러한 관계가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시각이 더 많다. 야당에서 김 교수의 등장에 손 놓고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올해부터 한은 총재는 임명 전에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한은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지난해 관련 법안이 통과됐다. 김 교수가 후보로 나설 경우, 한은 총재자리가 논공행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청와대·정부의 눈치만 보면서 한은의 독립성과 위상이 다시 추락할 것이란 비난과 우려가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각국 중앙은행 간의 공조 등이 중요해진 만큼 국제적 감각과 인맥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고 조세연구원 부원장, 대통령 경제보좌관 등 행정을 두루 경험해 주목을 받고 있다. 다만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지낸 경력이 여권에선 곱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국제공조에 무게가 실릴 경우 IMF 통화·환율정책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장영 금융연수원장도 부상 가능성이 있다.
이덕훈 대표는 서강대 출신 금융인회 좌장으로 금융통화위원도 역임해 박 대통령이 눈여겨보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김 총재 재임 기간 중 상처가 난 내부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한은 출신으로 이주열 전 부총재 등도 거론되고 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