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창규 KT 회장이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KT 광화문사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20일 KT는 정정공시를 통해 실적이 ‘적자전환’했음을 알렸다. 불과 20일여 전인 1월 28일, 지난해 영업이익 8740억 원에 당기순이익 1816억 원의 흑자를 냈다고 했던 것에서 603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고 말을 바꿨다.
정정공시는 이따금 볼 수 있다. 그러나 굴지의 대기업이, 그것도 흑자에서 적자로 정정하는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게다가 1816억 원 흑자에서 603억 원 적자로 돌아섰으니 정정 폭은 무려 2400억 원이 넘었다. KT가 연간 실적 적자를 기록한 것은 창사 이래 처음이다. KT는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 집계 자산 기준 재계 11위다. 이러한 까닭에 KT의 정정공시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보다는 황창규 회장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이유에서 KT의 정정공시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적지 않았다. 나쁜 실적을 전임 이석채 회장의 탓으로 모두 돌리고 신임 황창규 회장이 홀가분한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
KT의 새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황 회장이 단행한 일은 이석채 전 회장의 색깔 지우기다. 이 전 회장이 영입하거나 중용한, 이른바 ‘올레KT’ 인사들을 내보내고 ‘원래KT’ 인사들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탈 통신을 외치며 통신 이외 사업을 확장하는 데 힘쓴 이 전 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반대로 ‘1등 통신’을 강조하며 통신회사로서 본연의 사업영역에 매진할 뜻을 내비친 점 등이 그렇다. 대규모 정정공시 역시 이의 일환이라는 것.
하지만 KT에 대형 악재가 연달아 발생,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출발하려던 KT와 황 회장의 마음이 무거울 듯하다. 고객 1200만 명 개인정보 유출과 자회사 KT ENS의 대출 사기 사건에 이은 전격적인 법정관리 신청으로 KT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건에 비하면 방송통신위원회의 45일간 영업정지 조치는 차라리 간지러울 정도다.
KT ENS의 법정관리 신청도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못지않은 대형 사건이다. 대기업 자회사가 모회사와 관계없이 단독으로 법정관리 신청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KT ENS가 KT의 100% 자회사라는 점에서 황 회장과 KT는 무책임한 ‘꼬리 자르기’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100% 자회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모회사가 입을 피해도 상당할 텐데 정상화 작업을 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꼬리 자르기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 같은 일은 건설회사에서 가끔 볼 수 있는데 LIG건설의 법정관리 신청이 그렇다”며 “그러나 이는 모회사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 경우인데 KT가 KT ENS에 대해 그 정도로 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경찰들이 지난달 사기대출 혐의로 KT 자회사인 KT ENS 협력업체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한 증거물을 차량에 싣고 있다. 연합뉴스
일각에서는 오너 없는 회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재계 다른 고위 관계자는 “오너가 있고 없고를 떠나 상식적이고 도덕적 차원의 문제”라면서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 성의를 보여야 마땅한데 대출 사기 사건과 개인정보 유출 사건 같은 심각한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참에 아예 잘라버리자는 심산인 듯하다”고 말했다. KT ENS는 3000억 원대의 대출 사기 사건에 연루돼 있다. 금융권에서는 KT ENS의 전격적인 법정관리 신청이 대출금을 갚지 않기 위한 꼼수로 보고 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KT 관계자는 “KT ENS의 일을 고민한 결과 주주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결정했다”며 “회사가 청산되면 자본금 손실로 모회사도 피해가 불가피하지만 법정관리 신청 자체로 KT에 피해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KT 내부에서는 이 같은 악재가 지금 터진 게 되레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KT 직원 중에는 “몇 개월 후에 이런 일이 터졌으면 현재 회장이 직접 책임 대상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속되는 악재의 여파는 지금의 KT와 황 회장에게도 몰아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0일 KT가 5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회사채 발행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해 투자자들이 회사채에 대한 투자 판단을 정확히 내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 금감원은 KT가 제출한 증권신고서를 되돌려 보낸 것이다. 앞으로 3개월 안에 KT가 새로운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KT의 회사채 발행 계획은 철회된다. KT 관계자는 “증권신고서를 다시 제출할지 고민 중”이라면서 “워낙 최근 발생한 사건이 중대하고 상황의 불확실성이 커 보완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회사채 발행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신규 자금 모집을 포기하면 사업 진행에도 차질이 빚어질 공산이 크다.
또 황창규 회장 본인은 검찰에 고발된 상태다. 지난 12일 서울YMCA는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황창규 KT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KT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으며 구원투수 황창규 회장의 ‘돌직구’는 아직 통하지 않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