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배인순씨가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왼쪽은 배씨의 책 표지. 임준선 기자 | ||
70년대 인기를 누리던 자매듀엣 ‘펄 시스터즈’ 멤버로 재벌그룹 회장과 결혼했다가 98년 이혼, 은둔생활을 해오던 배인순씨(55·본명 김인애)가 마침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자신의 히트곡인 ‘커피 한잔’에서 이름을 딴 자전소설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잔>을 세상에 내놓은 것.
배씨는 이 책을 통해 가수로서의 추억,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과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벌그룹 며느리로 겪었던 고부갈등, 자신을 둘러싼 스캔들 등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을 ‘소설’ 형식으로 한올한올 풀어놓았다. 특히 이니셜이기는 하나 당시 남편과 ‘애정 행각’을 벌였던 유명 여자 연예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묘한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배씨는 틈틈이 적어놓았던 일기를 바탕으로 엮은 이 자전소설에서 최 전 회장을 ‘C’ 혹은 ‘그’로 지칭하고 있다. 과연 배씨 주변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다음은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잔>에서 발췌한 주요 내용.
[여배우 J와의 '애정행각']
“이봐, 밖에 나가 쇼핑 좀 하고 오지, 그래?” 오후 4시경, 여느 때보다 일찍 퇴근해서 들어온 그가 일하는 아줌마에게 지하 ‘한실’방을 좀 치우라고 하더니 내게는 쇼핑 다녀올 것을 강요했다. “왜요?” “으응, 누가 좀 오기로 했어.” 선뜻 말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이상했다. “누군데요?” “으응, J 알지? 그녀가 오기로 했어.” 몸에 힘이 쭉 빠지며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 당당하게 다른 여자와 밀애를 즐길 테니 집을 비워달라는 그에게 대꾸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느긋하게 쇼핑하고 저녁 무렵에 오라구.” 그게 끝이었다.
[탤런트 L양과의 스캔들]
그의 애정행각은 끝이 없었다. 조간 신문 광고면에 나온 연예인을 한동안 뚫어져라 눈여겨본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그 연예인과의 관계가 소문으로 돌곤 했다.
배우 겸 탤런트 L양과의 스캔들만 해도 그렇다. 출연했던 드라마와 영화가 뜨거운 호응을 얻은 L양은 선이 뚜렷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섹시한 매력을 풍기는 A급 연기자였다. 그는 L양을 조간신문 커피 광고면에서 새롭게 발견한 듯 한참을 뚫어져라 눈여겨보더니 “배우 L의 눈매와 오뚝한 콧날이 꼭 당신을 닮았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하기가 무섭게 L양과의 스캔들 기사가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탤런트 K양의 임신 소동]
“당신, 정관 수술 해줘요.” 생각보다 쉽게 그는 내 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를 달래어 그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토요일, 대문 밖에서 콧소리 섞인 여자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남편을 찾으며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라고 아주머니에게 다그치자, “탤런트 K양 아시죠? K양이 찾아와서 경비원이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어요. 회장님 뵙겠다고 그래요.” 무슨 문제인지 짐작이 갔다. K양이라면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귀엽고 애교스러운 얼굴을 가진 그녀는 통통한 볼과 달리 턱은 뾰족한 느낌이 들었고 몸매는 가냘프면서도 요염했다.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올라간 두 눈에는 끼가 넘쳐흐르는 탤런트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다던가요?” “자기가 회장님 아이를 가졌다고 그래요. 그래서 상의 드리러 왔다는 대요.”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라고 하세요.” 한창 옥신각신하던 끝에야 밖이 잠잠해졌다. 비록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갔지만 적어도 그와 하룻밤을 보낸 것만은 사실일 터였다. 더욱이 집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운 걸 보면 그가 하룻밤의 정사일망정 애틋한 고백도 오간 듯했다.
[가수 K선배와의 애정행각]
남편이 20대 초반에 여배우 L과의 풋사랑으로 얻게 된 딸아이. 나는 친엄마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일본에서도 최고의 갑부들만 이용한다는 대국 호텔을 약혼식장으로 정했고, 정성어린 혼수를 준비했다. 약혼식 전날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양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가 느닷없는 제안을 했다. “우리 가수 K나 불러서 노래나 한번 들을까요?” K라니!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수를 뜬금없이 일본 땅에 와서 부르겠다니! 사돈댁도 역시 상당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정말 그녀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가 미리 일본으로 불러들였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K는 내겐 가수 시절의 선배이기도 했다.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가창력 있는 가수인 그녀는 서구적인 마스크와 뛰어난 무대 매너,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와 그녀는 은밀하고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입가에는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고단한 심신을 이끌고 한국에 돌아온 날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지하 응접실에서 오붓하게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인터폰이 울렸다. 그제서야 미리 K와 남편이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 셋은 새로 딴 와인을 한 잔씩 마셨다. 서서히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남편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우리 셋이서 응접실 옆에 딸린 방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가 제안한 것은 내 상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와인을 한 잔 더 따라 목을 축이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K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고 그도 도어의 손잡이를 잡고서 내게 빨리 들어오라고 눈짓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손짓까지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희미한 테이블 램프는 서서히 옷을 벗는 두 남녀의 모습을 비췄다. 포도주가 혈관을 타고 나의 온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난 블라우스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쳐 버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연신 잔을 들이켰다. 나의 무릎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벽에 기대 선 채 주저앉으며 스르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