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치권에서 대북지원설이 터져 나오자마자 최종적으로 의혹의 불똥이 대선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 의원에게 튈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탈 현대’를 노리고 있는 정 의원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얘기다.물론 이 같은 시각의 중심 축에는 한나라당이 자리잡고 있다. 한나라당은 ‘대북뒷거래진상조사단’까지 만들어 ‘대북지원설’의 불을 계속 지피고 있다. 사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는 여론이 절대적이다. 또한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현대상선의 4천억원 중 일부가 현대건설 기업어음(CP)을 사들이는 데 사용됐다는 사실이 한나라당 의원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4억달러 대북지원설은 그칠 줄을 모른다. 현대상선에 대한 계좌추적을 위해 국정조사까지 요구할 태세다.
한나라당이 이처럼 대북지원설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데는 이 후보에게 위협적인 정 의원을 치기 위함만은 아니다. 대선기획단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대북지원설은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DJ와 민주당을 한꺼번에 공격함은 물론 골머리 앓게 했던 ‘병풍’을 국민의 관심대상에서 배제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 또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이 대선구도에 돌출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도 없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이런 효과가 이번 〈경향신문〉 여론조사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난 것이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북지원설이 사실일 것이라는 답변이 전체 응답자 중에서 48.8%를 차지했다. 연장선상에서 대북지원설이 사실로 드러나면 정 의원이 노 후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치적 상처를 받을 것으로 조사됐다. 정 의원으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노 후보는 DJ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에 있다. 따라서 그가 비밀지원설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정 의원의 경우는 다르다. 민주당 소속 의원도 아니고 햇볕정책 등 대북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아니다. 그는 또 대북지원설에 연루된 현대상선이나 현대아산에 대한 직접적인 지분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현대중공업 지분 11%(8백36만5주)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정 의원이 대북지원설과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와 비슷한 수준의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데서 그의 대선행보에 빨간 불이 켜진 셈이다.이런 점을 사전에 의식한 듯 정 의원은 지난 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 참석해 대북 비밀지원설의 조속한 규명을 요구했다. 정 의원의 이 같은 입장에는 ‘현대’ 이미지를 버림으로써 대북지원설의 유탄을 맞지 않겠다는 전략이 함축돼 있다.
그러나 대북지원설에 ‘MJ 물들이기’를 노리고 있는 한나라당의 전략은 상당히 치밀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4일 국회 정무위 국감에서 정형근 의원은 이근영 금감위원장을 상대로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현대아산의 채권·채무관계를 추궁했다. 답변에 나선 금감위측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에 대한 채무보증액이 2002년 6월 말 현재 3조원이 넘는 상태”라면서 “현대상선이 위태로우면 현대중공업도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고 말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상선에 현대중공업을 끌어들임으로써 정 의원을 공격하려는 한나라당측의 유도심문에 금감위가 걸려든 형국이었다. 정형근 의원은 이날 현대상선에 대한 계좌추적 요구는 물론 남북정상회담의 배후에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역할설도 제기했다.
현대상선 대출금 4천억원이 대북지원금으로 전용됐을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확실치 않다. 4천억원 비밀지원 의혹을 주장해온 한나라당은 현재까지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물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북지원설에 대한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 마저 주장이 엇갈린다. “현대아산을 통해 지원됐다(엄호성)” “국정원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갔다(김문수)” 등 제각각이다. 자금세탁, 환치기 등 송금방법에 대한 얘기도 서로 다르다. 한마디로 증거 없이 의혹만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에 체류중인 정몽헌 회장도 “현대상선의 재정난 해소에 전액 사용됐다”면서 대북지원설을 부인했다. 현대측의 주장대로 4천억원이 북한으로 송금되지 않고 현대상선 등 계열사 정리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현대상선 회계장부 일부에서 조작 의혹이 발견되고 있어 회사 경영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몽헌 회장에 대한 사법처리설도 흘러나온다. 이런 대목은 현대가의 일원인 정 의원에게 또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정 의원의 대선출마에 반대한 데는 현대가에 불어닥칠 정치적 폭풍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재계에서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4억달러 정국’이 계속될 경우 정국의 주도권을 한나라당이 쥠으로써 정몽준 의원이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정 의원은 대선 출마 선언 이후부터 전 언론의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대북지원설이 터지고 난 이후에 정 의원의 목소리는 언론에서 찾기 어렵게 됐다. 한나라당은 대정부질문을 통해 계속 ‘4억달러 정국’을 끌어갈 것이 분명하다.대북지원설이 권력핵심으로 비화되고 있는 점도 상황을 더욱 꼬이게 하고 있다.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는 지난 4일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4천억원 대출에 한광옥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개입설을 주장했다. 이 점 또한 정 의원에게 결코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DJ정부의 권력핵심부와 현대의 유착관계가 드러날 경우 한나라당의 주장처럼 ‘DJ=현대=정몽준’의 등식이 유권자들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 의원측의 입장은 비교적 간단하다. 정광철 공보특보는 “정 의원이 밝힌 것처럼 대북지원설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지원설이)정 의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따라서 대북지원설에 대한 특별한 대응전략이 필요치 않다”고 밝혔다. 정 의원측의 주장대로 대북지원설이 그를 가만히 놔둘 것인가에 대해 정치권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