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대검에 출두하는 전재용씨. | ||
차남 재용씨의 괴자금 1백67억5백만원 가운데 73억5천만원이 전씨의 ‘비자금 저수지’에서 흘러나왔다고 검찰이 밝혔기 때문. 여기에 재용씨의 나머지 괴자금도 대부분 ‘전씨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으로 검찰은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다.
검찰이 73억5천만원을 전씨의 비자금으로 보는 까닭은 지난 87년 전씨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 청와대 재무관을 지냈고, 이후 전씨의 재산 관리인으로 알려졌던 장아무개씨(미국 체류중)가 이 돈을 관리해오다 재용씨의 외조부인 이규동씨(2001년 사망)에게 넘긴 단서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재용씨가 자신의 괴자금 1백67억5백만원을 모두 이씨에게 증여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어 검찰은 우선 장씨로부터 이씨에게 전달된 73억5천만원에 대해서만 전씨의 비자금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꼭꼭 감춰뒀던 전씨의 비자금이 어떻게 검찰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것일까. ‘재산 은닉의 달인’이었던 전씨의 비자금이 검찰 수사로 일부나마 실체를 드러내기까지의 전 과정을 밀착 추적했다.
검찰이 ‘전두환 비자금’의 일부라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우연한 행운’이었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그동안 꼭꼭 숨겨져 있던 전씨 비자금의 꼬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7월께. 당시 대검 중수부는 ‘현대그룹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김영완씨(미국체류)가 박 전 실장에게 받았다고 주장한 양도성예금증서(CD) 1백50억원을 무기명채권으로 바꾸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
이 과정에서 검찰은 김씨가 무기명채권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제이앤더블유홀딩즈’라는 회사와 접촉한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의 확인 결과 ‘제이앤더블유홀딩즈’의 실질적인 경영주는 바로 전씨의 차남인 재용씨. 2000년 10월 설립된 이 회사는 한때 재용씨 부인인 최정애씨가 대표이사를 맡았었고, 경영 컨설팅 및 유가증권 중개업 등이 주요 사업 아이템이었다. 검찰이 현대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던 당시 재용씨는 이 회사의 이사로 등재돼 있었다.
검찰은 이내 김영완씨가 보유했던 무기명 채권과 어음 등이 이 회사를 통해 할인된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재용씨 관련 차명 계좌에 출처불명의 1백억원대 뭉칫돈이 숨겨진 사실을 발견했다.
‘과연 이 괴자금의 실체는 무엇일까. 마침내 전두환 비자금의 꼬리를 밟은 것일까.’ 검찰은 긴장 속에서 재용씨 회사 직원들을 하나둘 검찰청으로 불러들였다. 7월19일 미국 LA로 출국한 재용씨는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검찰은 재용씨 관련 회사 직원들을 상대로 그동안 수집된 정보를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김영완씨의 채권과 어음을 할인하는 데 쓰인 거액의 주인이 바로 재용씨라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 박지원씨의 재산관리인으로 알려진 김영완씨. | ||
이런 일련의 수사 과정을 통해 검찰은 ‘전두환 비자금의 그림자’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김영완씨는 박지원 전 실장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1백50억원대의 CD를 무기명채권으로 바꿨고, ‘세탁’을 위해 이 채권을 다시 제이앤더블유홀딩즈에서 현금으로 바꿨다. 이 즈음 재용씨도 외조부인 이규동씨로부터 증여받았다고 주장하는 국민주택채권 1백67억5백만원을 대여금고에 숨겨놨다가 노숙자와 사채업자를 통해 현금으로 바꿨고, 역시 ‘자금세탁’을 위해 이 현금으로 다시 김영완씨의 채권을 사들였던 것이다.
김영완씨와 재용씨, 두 사람이 돈세탁을 위해 채권과 현금을 ‘스와핑’한 것은 우연이라면 너무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김영완씨가 돈세탁하는 과정에서 재용씨가 실소유주인 회사와 거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검찰수사는 ‘전두환 비자금’ 쪽으로 옮겨가게 됐다”며 “재용씨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돈세탁을 하려 했다가 정말 ‘재수 없게’ 검찰에 걸려들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김씨와 재용씨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두 사람은 ‘비자금 거래’가 있기 전에는 전혀 모르는 관계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오히려 검찰의 수사 이후에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재용씨가 미국에 있던 동안 역시 미국에서 장기간 체류하고 있는 김씨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하지만 김씨와 재용씨가 워낙 대외적으로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직접적으로 접촉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검찰 주변의 시각이다.
현대 비자금 사건을 추적하던 중 재용씨 회사와 연결됐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검찰은 이후 철저한 보안 속에 내사를 벌여왔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재용씨 회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명동과 강남 일대의 사채업자들을 ‘조용히’ 불러 재용씨 회사에 관한 정보를 하나하나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검찰의 수사가 워낙 비밀리에 진행되다 보니 대검 출입 기자들도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었다. 한 일간지 대검 출입 기자는 “지난해 10월 말 검찰에서 ‘재용씨의 1백억원대 괴자금이 발견됐다’고 공식 코멘트할 때까지는 전혀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검찰은 현재까지 밝혀낸 재용씨의 괴자금 1백67억5백만원 가운데 73억5천여만원이 ‘전두환씨 비자금’이라고 밝혔다. 또한 나머지 93억5천5백만원도 전씨의 ‘비자금 저수지’에서 흘러나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재용씨가 “외조부에게서 증여받았다”고만 주장하고 있어, 검찰은 일단 재용씨를 74억3천8백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지난 10일 밤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했다.
▲ 지난해 4월 전두환씨는 법원에 출두해 자신의 재산을 밝혔다. | ||
검찰 조사 결과 재용씨는 채권 증여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강아무개씨 명의로 S은행 명동지점 대여금고와 한스메디텍 명의로 H은행 삼성동 지점 대여금고에 보관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한스메디텍은 지난 99년 12월14일 설립된 의료기기 제조 및 판매업체. 이 회사는 재용씨가 지금까지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4개의 회사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것으로 확인됐다.
자본금 3억원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이후 5억8천만원까지 증자를 했으나 서울 서초동 H빌딩에 위치했던 사무실은 지난해 6월 폐쇄된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그럼에도 상업등기부에는 재용씨뿐만 아니라 재용씨의 친구인 류아무개씨(40) 등이 16일 현재까지 이사로 등재돼 있다. 재용씨와 류씨는 소프트웨어 개발·공급업체인 ‘오알솔루션즈코리아’의 공동대표였으나 ‘재용씨 괴자금 사건’이 처음 불거진 직후인 지난해 10월27일 동반 사임하기도 했다.
검찰에 따르면 재용씨는 2001년 9월께 E증권에 노숙자 김아무개씨 명의로 차명계좌를 개설, 이 계좌를 통해 1백37억5백만원어치의 채권을 팔아 현금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을 갖고 사채업자들이 운영하는 계좌에 입금해서 기업어음 거래 등의 방법으로 관리해왔다는 게 검찰측 주장이다.
당시 현금화되지 않았던 30억원어치의 채권도 이듬해 6월 E증권 직원 이아무개씨를 통해 사채업자 김아무개씨에게 판매한 것으로 밝혀졌다. 재용씨는 나머지 채권을 팔 때도 E증권 직원에게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철저히 감춘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주도면밀하게 괴자금을 세탁했다는 얘기다.
검찰은 “이렇게 현금화한 자금으로 무기명채권을 여러 차례에 걸쳐 구입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했다”고 밝혔지만, 재용씨의 자금 관리원이라고 밝힌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재용씨는 자신의 주장대로라면 외조부에게 증여받은 채권을 치밀하게 돈세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뭉칫돈의 실주인을 감추려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세간에서 ‘재산 은닉의 달인’으로 불리는 아버지 전씨는 그런 차남을 바라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