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사기꾼을 다룬 영화 <하트브레이커스>의 스틸 컷.
“돈은 많은 거 같은데….”
경기도 파주시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성 아무개 씨(72)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말이다. 성 씨는 마을회관서 노인 회장을 맡고 있어 주변이웃들 사이에선 유명 인사였다. 게다가 성 씨는 알부자로 소문나기도 했다. 마을 대부분이 단층의 허름한 주택이었지만 성 씨의 집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깔끔했다. 몇 년 전 집을 증축하고 주변 땅을 사서 농사를 짓는 바람에 그가 부자라는 소문이 더욱 크게 번졌다. 일각에서는 성 씨가 수십 억 원대의 자산가라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데 성 씨에 관한 소문을 그냥 흘려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평소 성 씨와 친분이 있던 배 아무개 씨(여·57)와 딸 이 아무개 씨(여·22)였다. 모녀는 성 씨가 돈이 많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를 납치해 거액을 뜯어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여자 두 명이서 성인 남성을 납치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결국 그들은 인당 50만 원을 지급하고 김 아무개 씨(23)를 포함해 8명의 청부업자까지 고용했다.
순식간에 범죄단의 중심이 된 모녀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성 씨를 납치할 장소를 사전답사하고 범행이 적발됐을 때를 대비해 각자의 역할을 철저히 분담했다. 배 씨는 꼬리가 밟힐까 평소 살던 집이 아닌 서울의 한 빌라를 임시로 빌려 그곳을 범행 장소로 삼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지난달 11일, 성 씨는 그들의 손에 납치되고 말았다.
납치극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성 씨를 싣고 이동하는 순간에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여러 대의 렌터카를 바꿔 타는 등 완벽범죄를 꿈꿨다. 이들은 범행 장소로 빌려둔 서울 서초구의 한 빌라까지 성 씨를 끌고 오는데 성공했고 그의 은행카드를 빼앗아 현금지급기에서 1400만 원을 인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성 씨로부터 돈을 뜯어내지 못한 그들은 결국 성 씨를 살해했다. 이후 범행을 숨기기 위해 빌라 베란다에 벽돌을 쌓고 그 안에 시신을 숨기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
하지만 성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하면서 모녀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경찰은 배 씨의 집 주변 폐쇄회로(CC)TV에서 성 씨를 납치하는 데 사용한 승용차 등을 특정해 이들을 검거했다. 미국국적이었던 딸 이 씨는 경찰수사가 진행되는 시기와 맞물려 일시 출국을 하기도 했으나 귀국 후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 파주경찰서는 모녀에 대해 성 씨를 청부살해한 혐의(살인 및 살인교사)로 구속하고 청부업자들에 대해서도 수사가 마무리 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경찰은 “현재 납치 장소 및 정확한 범죄 경위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그런데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도 있다. 피해자가 자산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수준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피해자는 과거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만 둔 상태로 농사만 짓고 있었다. 평범한 시골 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산가라 불릴 수준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배 씨 모녀는 돈에 눈이 멀어 청부업자까지 고용해 수백만 원의 비용을 들였지만 고작 1천 4백만원으로 한 남자의 생을 맞바꾸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행각을 벌인 셈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